『역사란 무엇인가』
인간은 결코 자신의 환경에서 완전히 독립적일 수 없고 그것의 무조건적인 지배자일 수도 없다. 인간과 그의 환경의 관계는 역사가와그의 연구주제의 관계와 같다. 역사가는 그의 사실들의 비천한 노예도 아니고 난폭한 지배자도 아니다.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관계는 평등한 관계, 주고받는 관계이다. 연구 중에 있는 역사가가 잠시 일을 멈추고서 자신이 생각하고 글을 쓰는 동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면 다 알 수 있듯이, 역사가는 자신의 해석에 맞추어 사실을 만들고 또한 자신의 사실에 맞추어 해석을 만드는 끊임없는 과정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둘 중 어느 한쪽을 우위에 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가는 사실의 잠정적인 선택에서, 그리고 동시에 그 선택을 이끌어준 잠정적인 해석―그 해석이 그 자신의 것이건 다른 사람의 것이건 간에―에서 출발한다. 그가 연구하는 동안, 사실의 해석 그리고 사실의 선택 및 정돈, 이 두 가지는 이러저러한 상호작용을 통해서 미묘하고도 얼마간 무의식적일 수 있는 변화들을 겪는다. 그리고 이 상호작용에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상호관계도 포함되는데, 왜냐하면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고 사실은 과거에 속하기 때문이다. 역사가와 역사의 사실은 서로에게 필수적이다. 자신의 사실을 가지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쓸모없는 존재이다. 자신의 역사가를 가지지 못한 사실은 죽은 것이며 무의미하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a continu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his facts, and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라는 것이다.
웨지우드의 말에는 두 가지 주장이 결합되어 있다. 첫째,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행동은 집단이나 계급의 성원으로서의 행동과 구별되는데, 역사가는 그 두 가지 중에서 어느 쪽이든 정당하게 선택하여 고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행동에 대한 연구는 그 행위의 의식적인 동기를 연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첫 번째의 주장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말했기 때문에 상세히 논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인간을 개인으로 보는 견해가 인간을 집단의 성원으로 보는 견해보다 다소간 잘못된 것이라는 데에 있지 않다; 잘못된 것은 그 둘 사이를 구별하려는 그 시도이다. 개인은 당연히 한 사회의 혹은 하나 그 하나를 집단, 계급, 종족, 민족 등으로 부르건, 아니면 그 밖의 무엇으로 부르건 상관없이 이상의 사회의 성원이다. 예전의 생물학자들은 새장이나 어항이나 진열장 속에 들어 있는새, 짐승, 물고기의 종(種)을 분류하는 일에 만족하면서 생물체를 그것이 처해 있는 환경과 연관시켜 연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마 오늘 날 사회과학도 그런 원시적인 단계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 있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개인에 관한 학문으로서의 심리학과 사회에 관한 학문으로서의 사회학을 구별하고 있다; 또한 모든 사회적 문제들을 궁극적으로 개별적인 인간의 행동으로 환원시켜 분석할 수 있다는 견해에는 '심리주의(psychologism)'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그러나 개인의 사회적 환경을 연구하지 않는 심리학자는 큰 성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인간을 개인으로 취급하는 것은 전기(傳記)이며 인간을 전체의 일부로 취급하는 것은 역사라고 하면서 그 둘을 구별하는 것은, 그리고 훌륭한 전기는 나쁜 역사를 만든다고 주장하는 것은 솔깃한 이야기이다. 언젠가 액턴은 '인간의 역사관에서 개별적인 인물들이 유발시키는 관심보다 더 많은 오류와 불공정을 가져다주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 역시 비현실적이다.
만일 누군가가 히틀러나 스탈린―혹은 여러분들이 좋다면 매카시 상원의원―에 대해서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는 주장에 트집을 잡는다면, 그 이유는 그 인물들이 우리들 중의 많은 사람들과 동시대인이기 때문이며, 그들의 행위로부터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고통을 받은 수십만 명이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이며, 또한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우리가 역사가의 자격으로 그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어렵고 게다가 그들의 행위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정당화시켜줄 다른 자격들을 포기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역사가가 처해 있는 하나의 곤경―나로서는 주요한 곤경이라고 말하고 싶지만―인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오늘날 샤를마뉴나 나폴레옹의 죄를 고발한들 누가 어떤 이득을 보겠는가?
그러므로 역사가는 교수형을 내리기 좋아하는 재판관이라는 생각일랑 버리고, 개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과거의 사건이나 제도나 정책에 대해서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고 하는, 더욱 어렵지만 더욱 유용한 문제로 눈을 돌려보도록 하자. 그런 판단이 역사가의 중요한 판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에 대해서 도덕적인 유죄를 매우 열렬히 주장하는 사람들은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집단과 사회 전체에 대해서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역사가 르페브르(1874-1959)는 프랑스 혁명이 나폴레옹 전쟁의 참화와 유혈과 무관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 참화와 유혈이 '화해와 타협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기질을 가진 한 장군의 독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오늘날 독일인들이 히틀러의 개인적인 사악함에 대한 비난을 환영하는 것은 그 비난이 히틀러를 낳은 사회에 대한 역사가의 도덕적 판단을 만족스럽게 대체하기 때문이다.
나는 역사뿐 아니라 어떤 현상을 분석할 때도 개인이 아니라 그 개인에게 영향을 끼친 환경과 제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환경 속에서 개인은 무력하고, 내가 그 환경에 있었다면 그와 같이 행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고, 개인은 변칙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인사 평가나 회고에서 특정 개인에 대해 평가하기를 요구 받거나, 내가 개인으로서 평가받아야 할 때마다 괴롭다. 그런 종류의 피드백은 전혀 생산적이지 않다.
역사를 이야기할 때는 필연적으로 어떤 것을 이야기하고, 어떤 것을 이야기하지 않을지 취사선택하게 된다. 이때는 선택하지 않은 것들이 그 사람의 생각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문서를 인용한 문서
- 역사
- 중립성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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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H. 카는 이미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오늘날의 역사가 어떤 사실을 역사로 선택할지, 선택하지 않을지 취사선택하는 과정에서 중립성을 잃을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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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oodbye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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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워드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까치, 김택현 역,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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