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근현대사
고대 일본
- 일본의 고대는 6세기부터 12세기 초 정도.
- 아스카 시대:
- 고대 왕권의 확립. 사실 더 이전(4~5세기)부터 야마토 조정이 있었음. 근거지가 큐슈였는지 혼슈였는지 논쟁이 있음. 큐슈 설은 한반도로부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입장, 야마토 설은 일본 자체적으로 발생했다는 입장.
- 한반도와 교류가 활발했음. 이 시기 한반도는 삼국통일이 이뤄지던 혼란의 시기.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했기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는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함. 이 영향으로 일본도 혼란했음.
- 나라 시대:
- 사회의 안정화. 한반도 통일의 영향으로 일본에서도 일체감이 고양됨.
- 만엽집, 고사기 등 일본 서기 편찬. 왕권을 강화하려는 권력자들은 항상 '우리 조상이 이렇게 잘났다’하는 책을 쓴다.
- 헤이안 시대:
- 한시, 국풍 문화 등 일본만의 문화가 발달.
- 덴노의 힘은 약하고 귀족들이 득세하는 시대.
- 중앙 귀족들이 주요 관직을 모두 차지하고 지방 토호를 대리인으로 임명. 세금 징수가 임무.
- 지방의 토호가 출세하고자 수도에 와서 호위무사가 된다.
- 덴노는 고대부터 1500년을 이어온 왕권. 오늘날에도 덴노는 국가의 구심점. (서구에는 기독교 질서가 이 역할. 한국은 뭐가 있을까?)
- 중세에는 귀족과 무사 권력이 마구 뒤섞여있다. 덴노에게는 정치적인 힘이 없었음.
도쿠가와 정권
- 전국시대는 살육과 야만의 시대. 무사가 반란하는 하극상이 일상적이었음.
- 일본은 철저한 신분제 사회. 농민은 어떤 방법으로도 무사가 될 수 없었음.
전국 통일 다이묘
- 오다 노부나가:
- 과감하고 냉혹, 잔인, 신기술에 개방적, 정략에 능했음.
- 덴노의 권위를 이용해 통일 전쟁의 명분을 만들었음.
- 아시가루(오늘날의 병사)에게 급여를 지급해 군사력이 현격히 향상.
- 도요토미 히데요시:
- 검지: 일본 전토의 측량과 과세 시스템을 확립. 장원해체, 중앙집권 강화.
- 도수: 농민과 사원의 무기 몰수. 병농분리, 신분제도 확립, 무장봉기 방지.
- 도요토미의 전국 통일은 전쟁과 무력의 시대를 종식:
- 무사들은 이제 칼을 내려놓고 펜으로 일해야 했다. 무사들의 불만이 증가.
- 하지만 히데요시 정권은 무력으로 정당성을 얻은 정권.
- 정권도, 무사도 전쟁으로 스스로를 계속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 새로운 전쟁터를 찾아 대륙으로 진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발발.
- 도쿠가와 이에야스:
- 도요토미는 도쿠가와를 견제함. 도쿄로 파견해버림. 당시 도쿄는 갯벌.
- 세키가하라 전투.
- 도요토미 정권과 도쿠가와의 전투. (8만 vs 8만 정도 규모)
- 도쿠가와가 승리하며 도요토미 가문의 분열.
- 스스로를 쇼군으로 칭하며 막부 개설. 일본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체계 확립.
- 이 모든 것은 에도에서 벌어진 일… 오사카는 아직 도요토미 가문 세력권.
- 결국 도쿠가와는 오사카 여름전투에서 오사카성을 점령, 도요토미 가문을 멸문함.
- 도쿠가와의 에도 막부는 도요토미 이상으로 지배 체제를 확립하고, 신분제 시스템을 공고히했다.
신분제도
- 신분제가 자리 잡은 것은 에도시대.
- 에도 막부는 덴노의 권위를 올려주면서 덴노를 통제. 쇼군의 정통성 강화.
- 신분제를 통한 통치는 책임과 동시에 평화와 성장을 가져옴.
- 쇼군:
- 주요도시를 직할도시로 관할, 주요 광산의 독점권, 화폐 주조권.
- 군사는 하타모토(대대장)과 고케닌으로 구성.
- 다이묘:
- 영주. 지방의 치안 유지와 토지 관할권 행사. 에도시대의 다이묘는 이제 쇼군을 섬김.
- 쇼군과의 관계에 따라 분류:
- 후다이: 대대로 쇼군 가문을 섬긴 가신. 막부 정치의 실무자.
- 도자마: 막부와의 긴장관계.
- 쇼군으로부터의 통제:
- 거성 신축금지, 수리허가제, 결혼허가제, 대선 건조금지 등.
- 참근교대: 다이묘가 정기적으로 에도를 오가게 함으로써 다이묘의 경제력과 정치력 약화, 영지와의 일체감 약화, 전국적 문화교류 활성화. (에도에 와서 눈이 휘둥그레진 다이묘의 자식들은 촌스러운 고향을 벗어나고 싶었겠죠.)
- 무사:
- 전국시대의 무사(유럽 봉건제와 유사)와 그 위치가 달라짐.
- 무사는 농민을 직접 지배하지 못하고, 토지는 전문행정관에게 위임.
- 자신의 토지에 거지하지 못하고, 조카마치에 거주하며 도시 주민이 됨. 다이묘 저택근무, 작황평가, 연공징수, 치안유지 담당.
- 이제 무사의 토지는 관념화됨. 다이묘는 무사의 토지에서 예상되는 수입에 상당하는 액수를 급여로 지급.
- 지위상승을 위해 글을 배우면서 전사가 아닌 관료가 됨. 대부분의 무사는 빈곤했음. 많은 무사가 우산이나 나막신을 만드는 투잡을 뛰었다.
- 농민과 도시민:
- 농민: 인구의 80%. 여행 허가제, 도시 이주 금지, 연공 납부 의무.
- 지방 농민들에게는 중앙 권력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함. 무사도 조카마치에서 거주함. 살인 정도는 되어야 관리가 파견됨.
- 대부분의 문제를 마을 내에서 해결(무라하치부 등 수단). 마을의 결속력이 매우 강했고, 배타적이었음. 이러한 관습이 일본 지방자치와 집단주의 문화의 뿌리.
- 도시민: 조카마치 거주. 농민과 달리 이동의 자유가 있었음.
- 견습공, 상인, 지배인으로 이어지는 계층이 형성.
- 지주는 건물주에게 지대를 받고, 건물주는 세입자에게 임대료를 받음.
- 도시의 최대 위협은 지진과 화재. 대화재로 에도 전체가 불타는 사건도 있었음.
- 농민이 정치에 참여할 방법이 없었음. 봉기하는 수 밖에 없는데, 조직화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
- 막부가 쇄국정책으로 서양과의 교류 차단, 그리스도교 금지. 사회 통제 작용.
- 외부로부터의 쇄국만이 아니라, 내국인의 도항을 금지하는 것.
- 중국, 조선과의 교류는 지속. 네덜란드는 포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교류.
- 그 외:
- 사농공상의 바깥. 사회의 비주류. 농민과 천민의 대립 구도를 만들어 지배 체계 공고화.
- 부라쿠민:
- 에타: 호적이 없음. 피혁 제조, 죽은 우마 처리, 죄인 처형 및 감시, 고문.
- 조오카의 외곽 지역에 공동체를 구성해 거주. 주류 사회에서 불결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처리.
- 농민 봉기가 일어나면 최전선에서 농민들을 진압했음.
- 비닌: 생산적인 직업에 종사하지 못함. 처형장 잡역, 도로 청소, 시체 매장, 광대 등.
- 요시와라: 성매매 용인 지역. 요시와라 인근에 다양한 범주의 천민과 매춘부가 거주.
- 아이누족과 외국인.
외교
- 에도의 쇄국은 외국의 내항만이 아니라, 내국인의 도항과 귀국을 금지.
- 그리스도교 금지, 해외 문화 차단, 무역 이익을 막부가 독점.
- 쇄국은 막부의 교역과 외교에서 국내 헤게모니 유지를 위한 장치.
- 서양과의 소통 채널은 데지마.
- 쓰시마: 조선과의 교류를 위한 창구. 조선과는 통신관계.
- 류큐: 지배, 종속 관계.
- 명나라, 청나라, 네덜란드: 통상관계. 나가사키를 통해 무역.
도쿠가와 시대의 사회경제적 변용
- 무엇이 시대를 변혁하는가? 이데올로기. 결국 인간의 생각이 세상을 뒤엎는다.
- 사회의 붕괴는 급격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이전부터 서서히 결함이 드러남.
- 전통 사회의 붕괴는 보통 신분제의 결함으로 촉발됨. 사회 곳곳에서 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나옴.
- 신분제 사회의 맹점:
- 신분제의 틀을 뛰어넘는 발전이 불가능하다.
-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가능성을 실현할 수 없다. 틀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자유가 필요.
- 일본의 19세기 변혁은 외재적인 촉매와 내재적 요소 사이의 결합으로 촉발.
17세기의 호황
- 도시의 성장:
- 사무라이의 조카마치 입주와 함께 도시가 성장, 상업 발전. 사무라이는 항구적인 도시주민.
- 참근교대제로 인해 오사카-에도 통합, 도시화 촉진.
- 오사카의 발전: 오사카는 에도의 부엌. 연공미, 지역특산품 생산과 발전.
- 1700년경 일본인 5-6%는 인구 10만 이상 도시에 거주. (당시 유럽은 2%)
- 전체 인구의 10%는 인구 1만 이상 도시에 거주.
- 운송과 통신 인프라 구축. 화폐유통 활성화.
- 농촌의 성장:
- 소비 및 가공 원자재 제공. 막부와 번의 마을 무간섭.
- 농업생산력 발전, 식자능력의 확대로 농서유포.
- 농업인구의 급증.
- 하지만 이러한 호황에는 구멍이 있었다…
정체와 활황의 수수께끼
- 1700~1850년 37개 조카마치에서 인구가 20% 가량 감소. 지방 농촌 도시(마치)의 인구 성장.
-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도시에서 먹고 살기가 힘드니까.
- 1786년 덴메이 기근. 여러차례 심각한 수준의 대규모 기근이 있었음.
- 영아살해 관습:
- 가난한 농민이 기아를 방지하기 위해 영아를 살해.
- 혹은 성공한 농민이 자산분할을 방지하기 위해 살해.
- 도시 다이묘와 사무라이의 부패.
- 세수를 넘는 생활비 지출.
- 덕정령 발동. 상인으로부터 빌린 빚을 스스로 탕감. (채권 포기)
-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밭을 개간 (신전 개발):
- 대기근을 계기로 막부는 농업을 장려.
- 지방 영주들이 줄어드는 세수를 방어하기 위해 새로운 농토를 적극적으로 개발함.
- 농촌 지역의 원산업화:
- 농촌의 생산 발전. 방직에서 출발해 술, 간장, 된장 등 제조업으로 발전.
- 농촌이 도시의 시장 독점으로부터 벗어남. 조카마치 쇠락.
- 급부상한 농촌의 생산업자들은 농민을 일용직 노동자로 만들었음.
- 농촌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 여성이 노동인구로 편입. 여성에 대한 무시는 여전.
- 농민저항의 증가: 야반도주, 잇키(농민봉기, 운동), 우치코와시(부패한 위정자/부자의 가옥 파괴).
- 이러한 양상은 유럽과 유사:
- 다만 유럽은 농촌의 성장이 됫의 쇠퇴로 연결되지는 않음.
- 유럽은 국제무역과 식민지로 도시를 부흥했기 때문. 유럽 자본가-노동자 근대 국가의 씨앗.
- 경제적 성쇠는 지역간 차이뿐 아니라 계층간 차이를 확대:
- 체계적인 사회보장 정책의 부재.
- 초기 도쿠가와 막부의 온정주의 상실,
- 사회 저항 확대: 권력자를 향한 공격은 신분에 걸맞는 온정을 베풀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
도쿠가와 후기의 지적 상황
- 시대가 어떻게 변하는지, 그 변혁의 순간을 살펴보자.
- 전근대 사회가 변혁하는 과정에는 전형적인 징후와 절차가 있음.
- 말세에는 흔히 두 가지 인간 부류가 나타난다: 강자에게 빌붙는 자들, 자포자기하는 자들.
- 두 부류가 동시에 나타날 때 세상이 뒤짚어진다.
도쿠가와 체제의 이데올로기
- 권위는 피지배자들이 수긍하는 통치의 정당성으로부터 발생:
- 노부나가는 천하의 화신, 도요토미는 스스로를 신격화하며 덴노와 같은 지위.
- 도쿠가와는 종교적, 세속적 전통에 대한 철학적 주장으로 정당성을 확보.
- 피지배자는 위계질서와 신분제를 내면화하고, 스스로의 위치를 받아들임. 헌신적인 봉사를 덕목화.
- 일본 뿐만 아니라 전근대 사회의 모든 지도자가 이렇게 권위를 확보함.
- 스즈키 쇼산, 야마자키 안산이, 하야시 라잔 등 유학자들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정립.
- 기본적으로 유교 사회였는데, 야마자키 같은 이단아가 일본식 체제를 만듦.
문화적 다양성과 모순
- 이상 사회에 대한 관념과 현실의 모순을 설명하는 논쟁 발발.
- 도시는 쇠락하고 평민는 굶주리고 무사도 빈곤해짐. 신분제 질서에 대한 불신 확대.
- 교리를 어떻게 수정하나? 시도만 해도 이단인데. 근데 일본은 유교를 기술로 이해하고 수정했다:
- 조선도 이런 논쟁을 했다. 근데 교리를 수정하지 않고 심화하는 방향으로 진행.
- 오규 소라이: 주자의 유교는 일본에 맞지 않는다. 공자가 말한 고대 유교 체제를 다시 세우자.
- 가이토쿠도: 상인을 위한 학문소.
- 상인의 위상을 강화하자. 사무라이 지배권을 인정하지만, 상인도 기능이 동등하다.
- 사무라이와 상인은 신분의 차이가 아니라 역할의 차이라고 주장.
- 하지만 이러한 철학이 혁명적 실천으로 이어지지는 않음. 그냥 작은 목소리였을 뿐.
- 문화의 분출:
- 유곽, 연극, 가부키, 하이쿠, 우키요에, 서민문화의 발전으로 지배자 풍자.
- 문화가 시대의 변화를 반영. e.g., 한국의 Y2K 같은 세기말 문화. 다른 점은 방향성이 없다는 것.
- 검약령:
- 사회가 위기에 빠지면 근검절약을 강조하는 캠페인이 시행됨.
- 검소한 사회 분위기, 신분에 따른 행동규범을 강조해 위기를 타개하려는 시도.
- 억제할 수 없는 갈등:
- 개인의 능력과 세습적 신분 사이의 모순:
- 일본에는 과거제가 없었음.
- 체제 유지를 명목으로 인재 등용.
- 덴노와 쇼군 사이의 갈등:
- 도쿠가와 막부의 권위는 덴노가 조건부로 위임한 것으로 인식됨.
- 막부를 교체할 수 있다는 생각. 덴노를 지지하는 세력이 점점 커짐.
개혁과 비판, 반란사상
- 에도 막부는 농경사회:
- 농경사회의 한계는 확장되지 않는다는 것. 공업은 생산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
- 개혁을 통해 잠시 불만을 잠재울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음.
- 그러다보니 막부가 경제 성장에 대응할 수가 없었음:
- 화폐경제가 발전하면서 상인이 성장.
- 연공만으로는 막부의 재정이 약화, 사무라이들이 빈곤해짐.
- 3대 개혁: 농민 증세, 고케닌 채무 면제(덕정령), 상업 억제
- 모든 개혁이 실패하고, 화폐경제에 대응한 재정 시스템을 만들지 못함.
- 막부의 경제 전문가 타누마의 신경제정책:
- 지금까지는 상업을 억제하고 무사의 권리를 보장하는 경제 개혁을 시도함.
- 오히려 상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막부의 재정을 재건해야 한다.
- 동업 조합을 공인해 과세, 나가사키 무역 진흥, 대상인 개간 권리 부여, 동/놋쇠/인삼 등 전매.
- 지금보면 옳은 정책. 하지만 반대파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 타누마 이후 중상주의 정책은 메이지 유신이 되어서야 등장.
- 개혁을 향한 열망은 점점 강해진다. 크게 두 가지 개혁 노선이 발전:
- 유교 강경 노선:
- 미래에 대한 불안은 과거를 향수하게 만들고, 사회가 황금기로 복고하려 시도함.
- e.g., 노인들은 박정희 시절을 떠올리며 박근혜에게 투표함.
- 고학: 다시 공자의 정통을 세우자!
- 고학이 일본에서만 유행한 것이 아님. 한중일이 비슷한 시기에 겪음. 조선은 실학이 같은 위치.
- 과거로의 회귀는 불가능한 일. 과거와 현재의 상황이 다르다. 결국 사회 문제는 더욱 커짐.
- 실용주의 노선: 이념적 기반이 없음.
- 체제 전복 사상과 세력의 성장:
- 국학: 교육받은 농민과 지식인들이 체계화함.
- 유교파는 고학에서 황금기를 찾다가, 기원전 6~7세기에서 일본의 황금기를 찾게 됨.
- 고대 일본 황금기는 덴노가 일본을 완전히 지배하던 시기.
- 유교 경전이 아니라 일본만의 전통에서 해댭을 찾고하는 시도.
- 다이묘와 영지, 쇼군에 대한 충성을 뛰어넘는 '일본’에 대한 충성.
- 일본적인 것을 강조, 국수주의적 성향, 이후 제국주의적 대외정책과 일본 우익의 사상적 토대.
- 정권 전복을 주도하지는 못했지만, 근대적 국가 실체를 향한 전초적 여론을 형성.
- 미토번 학자: 막부를 직접적으로 비판. 막부에게 덴노에 대한 존경과 개혁을 요구.
- 난학:
- 18세기부터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이 일본에 접근.
- 일본은 네덜란드를 통해 세계 정세를 이해하고 있었음.
- 외세의 침입을 덴노의 힘으로 극복하자는 생각. 덴노가 전면에 등장.
- 양서 수입금지 조치의 완화로 서양학문을 연구하는 난학이 형성.
- 농민 봉기와 신흥종교운동:
- 이세신궁: 덴노 가문을 신으로 숭배하는 신궁.
- 황금기로의 회귀가 아닌 덴노를 구심점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방향성이 형성.
도쿠가와 체제의 전복
- 지금까지는 일본의 내적인 요인을 살펴봤음.
- 이제 외적인 요인을 찾아보자. 외적인 요인이 내적인 요인과 결합해 폭발한 것.
서양열강과의 불평등조약
- 서구의 개항요구. 서구는 자본주의와 내셔널리즘 혁명의 강령한 상징.
- 도자마다이묘는 존왕양이를 내세우며 막부에 도전. 사회하층민의 지지획득.
- 막부에게 도자마다이묘와 서구는 큰 위협이었음.
- 막부는 네덜란드를 통해 서구열강에 대응.
- 그런데 영국 배가 네덜란드 국기를 달고 입항해서 항구 직원들을 인질로 삼음.
- 일본 입장에선 영토를 무단으로 침입당한 상황.
- 이후 외국선이 입항하려 하면 무조건 공격하는 방침을 세움.
- 모리슨호: 표류한 일본 선원을 구조해서 입항하려 했으나 공격받음. 순수한 의도였을까?
- 그러다 1840년 아편전쟁이 일어남.
- 일본은 네덜란드로부터 청나라가 패배했다는 정확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음.
- 조선은 청나라로부터 오랑캐들에게 아량을 베풀었다는 정보만을 접함.
- 막부는 이로인해 서구 열강의 위력을 느끼고 서구에 대한 경계심을 키움.
- 하지만 일본 민중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음. 민중과 막부의 정보 격차로 갈등 심화.
- 신수급여령: 외국선에게 연료와 물을 제공.
- 미토번 등 초기 국수주의적 개혁론자들이 대두됨.
- 외세에 대한 막부의 굴욕적 대응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확대.
- 쿠로후네 사건: 1853년 페리 제독의 미 해군 동인도 전대의 내항.
- 미국 동부에서 출발해 남아공, 인도, 홍콩을 지나 8개월만에 에도 만에 도착.
- 페리 전대는 그냥 범선이 아니라 거대한 증기철갑함으로 구성. 이걸 세 척이나 동원.
- 막부에 통상과 전쟁 양자택일을 강요하며 개항 요구. 1년의 시간을 주고 홍콩에 정박.
- 당시 막부는 세력과 권위가 위협받고 있었음:
- 따라서 국내 여러 세력에게 자문을 구해 의견을 수렴하고 합의 결정을 하고자 함.
- 심지어 페리에 대응하기 위해 지방 다이묘들에게 대포와 거함 조선, 제철을 허가.
- 지금까지는 덴노와 지방 다이묘를 억압하다가 이렇게 발언권을 주니 정치가 개방되는 부작용.
- 막부의 의도는 책임 분산이었지만, 이로인해 막부의 정통성이 훼손되고 붕괴가 촉진됨.
- 이 모든 일을 홍콩에 있는 페리도 파악하고 있었다.
- 결국 1854년 미일수호조약 체결, 다른 열강들과도 줄줄이 불평등조약 체결.
- 조약 체결을 주도한 세력이 부상하지만, 수구 세력이 11살 쇼군을 앉히며 정리.
- 근대일본 내셔널리즘의 창출:
- 일본은 19세기 초부터 후반에 이르는 동안 외국과의 접촉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
- 사람들은 막부 관료, 다이묘의 성, 사무라이를 탈피해 단일국가로서의 일본을 상상하기 시작.
- 덴노를 중심으로 새로운 일본을 세우자는 생각이 성장, 막부의 영향력은 더욱 쇠퇴.
- 아직 실체는 없지만, 양이사상과 존왕사상을 바탕으로 개혁 세력이 서서히 형성됨.
도쿠가와 체제의 붕괴
- 개항만으로 실질적인 피해를 받지는 않는다. 진짜 위협은 통상조약에서 발생.
- 미일수호통상조약:
- 나가사키, 에도, 오사카 등 항구와 도시 개방, 자유무역 시행.
- 외국인 거류, 공사, 영사 주재 허가,
- 영사의 재판권 인정: 일본 영사 재판권도 인정됐으나, 일본내 미국인이 훨씬 많았으므로 불평등.
- 양국 협정을 통한 관세 도입.
- 덴노의 인준없이 막부 단독으로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
- 초과 수출로 인해 내수 물가가 폭등하고, 수입으로 생산자의 반발 증가.
- 결국 개국으로 금 유출, 물가 상승, 유통 구조의 붕괴가 발생.
- 서구 열강에 대한 불만과 반막부 세력의 급속한 성장.
- 보수파: 막부의 전통적인 권위를 다시 세우자. 막부 강경파와 원로 등.
- 반막부파: 유력 다이묘, 조정 관료 등 엘리트층.
-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이 존왕양이를 주도.
- 과격파: 요시다 쇼인과 쇼카손주쿠에서 공부한 제자들.
- 요시다 쇼인은 미국을 눈으로 보갰다며 페리의 전함에 밀항을 시도한 인물.
- 막부를 타고하고 덴노를 중심으로 외세를 막자는 존왕양이 사상.
- 반막부파의 성장:
- 조슈와 사쓰마는 가장 반항적이었던 지역.
- 조슈 번:
- 부채 면제, 전매 강화, 군사력 강화 등.
- 중급가신이 실권을 잡고 덴포 개혁 진행, 중급가신들이 실권을 장악.
- 19세기 중후반 유럽에서도 실무 관료들이 실권을 장악했음.
- 이런 현상은 근대 관료제 형성의 핵심이자, 근대 국민 국가 생성의 전제가 아닐까?
- 사쓰마 번:
- 조슈 번과 마찬가지로 부채 면제, 전매 강화 등 개혁.
- 덴노를 추앙하는 지사들의 성장:
- 유신 3걸: 메이지유신을 이끈 세 명의 젊은 지식인 3명.
- 막부 체제가 미래의 일본을 이끌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폭발.
- 직접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을 선택. 요코하마 미국 영사관 습격, 서양인 대상 테러 등.
- 존왕양이파는 극단주의파와 현실타협파로 분열, 결과적으로 현실타협파의 승리.
공포와 유화의 정치
- 막부는 서구열강, 반체제 다이묘, 급진적 사무라이로부터 3중 위협을 받음.
- 막부는 위협에 권력 집중으로 대응:
- 안세이 대옥: 100여명의 존왕양이파 인사를 체포해 반대파 숙청.
- 공무합체: 결혼을 통해 막부와 조정의 제휴.
- 공무합체 이후 사쓰마 번은 온건노선으로 안착. 조슈 번과의 분열.
- 한편으로는 강도 높은 개혁안도 수용:
- 참근교대제 폐지, 세 명의 유력 다이묘를 쇼균 특별 고문으로 임명.
- 이를 통해 극단주의 존왕양이파를 타진하고자 했음.
- 하지만… 전국의 과격 사무라이들이 교토로 집결하는 부작용이 발생:
- 이 지사들은 아예 덴노를 찾아가 직접 양이를 요구, 덴노가 수용함.
- 하지만 막부는 덴노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음.
- 조슈 번은 덴노의 명을 따라야 한다면서 미국 상선에 포격, 서양 연합 전대의 보복으로 박살(시모노세키 전쟁).
- 막부와 사쓰마는 공조하여 조슈 출신 지사와 막부에 반대하는 조정 고문들을 무력 축출.
- 제1차 조슈정벌(1864):
- 조슈 번은 덴노를 해방한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위해 교토로 진군하지만 진압당함.
- 막부의 조슈 정벌, 처음부터 조슈 번이 질 수 밖에 없는 전쟁, 조슈의 항복.
- 막부는 조슈 번에게 주모자 처벌과 상급 사무라이들에게 권력 이양을 요구.
- 공무합체의 온건파가 다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막부의 부활과 삿죠동맹, 불안정한 정세
- 조슈 번은 공무합체 때 등을 돌린 사쓰마 번에 실망했는데 어떻게 동맹을 맺었나:
- 사쓰마 번의 번주가 에도에서 사쓰마로 돌아오던 중, 요코하마에서 영국 상인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살해(나마무기 사건). 사쓰마가 영국에 박살(사쓰에이 전쟁)나고, 사쓰마도 서구열강의 힘을 알게 됨.
-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은 비슷한 경험을 한 것. 이들은 양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됨.
- 도사 번의 사카모토 료마가 사쓰마와 조슈의 은밀한 동맹을 중개함:
- 조슈는 사쓰마에 쌀을, 사쓰마는 조슈에 무기와 탄약을 제공하는 경제 동맹을 맺음.
- 이러한 과정에서 불신감을 회복하고 군사동맹으로 이어짐.
- 1866년 1월 샷죠 동맹이 비밀리에 성립.
- 막부의 소생 시도:
- 민간 행정과 군사 분야에서의 인재 등용, 정치구조 간소화 등 개혁 단행.
- 훗날 메이지 유신이 실시한 개혁과 유사했음. 막부가 스스로 정치체제를 혁신했다면 생존했을 수도.
- 개혁에는 한계가 있었음. 사쓰마와 조슈는 막부 체제에 종송되는 것을 반대, 독자적인 군사력 증강.
- 제2차 조슈정벌(1866):
- 조슈는 막부와 대등한 군사력을 확보, 조슈의 군대는 이미 화기를 중심으로 개편되어 있었음.
- 결국 막부의 패배로 정권 몰락의 시초가 되며 종말론적 구원을 바라는 민중 욕구가 확산.
- 아직 막부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교토를 중심으로 조슈가 세력을 장악하게 된다.
- 막부가 제2차 조슈정벌에서 패배한 뒤:
- 질서 붕괴, 민중의 빈곤 심화, 도시폭동과 농민폭동의 증가.
- 에에자나이카: “이런들 어떻게 저런들 어떠한가, 좋지 아니한가”, 군중이 춤추고 행진하며 약탈.
- 대정봉환:
- 이제 막부는 약해질대로 약해짐. 이제 누가 권력을 잡을 것인가?
- 사카모토 료마는 영국식 정치 모델을 제안, 다이묘 협의체와 무사/서민 협의체로 구성된 양원제.
- 1867년 쇼균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료마의 제안을 수락하고 덴노에게 권력과 주권을 반납.
- 반체제의 선봉에 있던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은 갑자기 료마가 끼어든 것처럼 보여 분노.
- 조정에는 왕정복고파(덴노 중심의 새로운 정부)와 공의정제파(도쿠가와와 함께 정치)가 대립:
- 1867년 12월 사쓰마와 조슈의 군대가 황거를 장악하고 1868년 1월 덴노가 왕정복고를 선언.
- 이 황거를 장악한 행위가 흔히 말하는 '메이지 유신’의 실제적 행위임.
- 카츠 카이슈의 에도성 항복:
- 카츠 카이슈는 미국에 가본 사람이고, 막부의 신하였지만 그 이상의 체제를 상상한 사람.
- 새로운 정치질서를 평화적으로 확립하기를 기대하면서 항복을 결정.
- 에도 성은 평화롭게 함락되었음.
- 이제 막부가 소멸했지만, 전국 곳곳의 친막부파가 반란을 일으킴.
- 특히 일본 북부에 끝까지 신정부 세력에 저항한 번들이 있었음.
- 이 지역 출신들은 사회에서 상당한 디메리트를 안고 살았다. 심지어 20세기 후반까지도.
- 조정의 오개조 발표:
- 중요 사항은 모두 공공의 논의를 거쳐 결정해야 한다. (근대 의회 정치)
- 악습을 고쳐 천지의 공도에 기초해야 한다. (국제적 정당성의 인정)
- 국민의 선두에 서서 천지신명에게 서약, 국시를 결정하고자 한다. (근대 국가 성립)
- 사쓰마 & 조슈 군대 오방의 게시:
- 인간으로서 오륜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 (유교 가치 표방)
- 무리를 지어 강소하거나 집단 도망해서는 안 된다.
- 크리스트교를 엄금한다. (서구 열강의 반발로 얼마 뒤 사라짐)
- 외국인 폭행을 금지한다.
- 부랑, 본국탈주를 금지한다. (이동의 금지)
-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지만 세상이 천지개벽하지는 않음. 세상이 그렇게 급격히 바뀌지 않음.
무사들의 혁명
- 메이지 유신의 핵심은 삿죠 연합군이 황가를 장악하고 덴노에게 포고문을 읽도록 강요한 것.
- 막부의 영토는 대부분 신정부에 귀속. 아직 지방 번들은 독자적인 영토와 권력을 가졌음.
- 유신지사들은 근대 국민 국가를 상상했기 때문에 번을 해체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세워야 했음.
- 일본의 혁명은 위로부터의 혁명:
- 구정권의 부역자였던 엘리트층이 구정권을 공격해 개혁한 것.
- 무사들은 봉급을 받는 피고용자였다. 대부분이 빈곤했고, 토지도 없었음. 이들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엘리트 층에 비해 잃을 것이 없었음.
- 유신에 가담한 무사는 협소한 번의 경계를 초월하는 의식을 형셩. 이렇게 형성된 국민의식이 광범위한 개혁 프로그램을 수용하게 만든 동기가 됨.
메이지 혁명의 프로그램
- 정치적 통일과 중앙집권적 관료제:
- 260여개의 번을 갑자기 통일하는 것은 불가능. 덴노를 구심점으로 통합을 추진해야 했음.
- 도쿄로 천도하고, 덴노가 교토에서 도쿄로 이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기존 전통을 단절.
- 대규모 흉작과 농민 잇키, 존왕파의 반정부 운동, 암살 사건 등.
- 내각제 출범, 총리 선출, 삼권분립: 정원(행정), 좌원(입법), 우원(사법)
- 공무원 시험 제도 신설, 철저한 관료제 국가의 창설:
- 당시 대부분의 관료들은 사쓰마, 조슈 번의 무사들.
- 이후 관료 교육 기관을 만들어서 졸업생들을 관료로 등용함. 그게 지금의 동경제대 법학과.
- 하지만 사립대학들의 반발로 시험 제도를 만든 것. 능력주의로 정당성 확보.
- 신분제 폐지:
- 사무라이의 특권 박탈. 칼을 찰 권리(대도권), 평민을 처형할 권리(민??권), 성씨를 사용할 권리.
- 특권을 잃은 무사들은 강하게 저항, 사이고 다카모리 주도로 무장반란 발발.
- 반란군이 조직되어 내전에 가까운 상황이 일어나기도 함.
- 무장반란이 동력을 잃으며 비폭력 자유민권운동 전개.
- 비사무라이들은 모두 평민으로 규정. 복장, 이동, 직업 제한 해제.
- 하지만 천민 출신은 부라쿠민으로 지칭. (호적에 찍힘)
- 부라쿠민 해방운동 전개.
- 징집 군대:
- 군대 문제에 대한 두 견해:
- 농민+사무라이 혼성부대 (조슈 번): 기도 타카요시 등.
- 사무라이 군대 (사쓰마 번): 사이고 다카모리. 사무라이의 일자리 문제와 직결.
- 20세 이상 남성 현역 3년, 예비역 4년 징병제 포고.
- 금전으로 면제 가능. 근데 '혈세’라는 용어를 써서 사람들이 피를 뽑는줄 알고 폭동이 일어남.
- 폭동은 완전히 진압되었고, 결국 징병제가 시행됨.
- 징집 군대는 규율과 사기가 완전히 떨어진 상태였음.
- 군인칙유(복무신조), 학교 교육을 통해 군복무를 애국적 의무로 강조.
- 훗날 청일전쟁의 승리로 애국심이 고취되면서 군대의 규율과 사기가 확립됨. 더불어 의무교육 세대가 군대를 구성하는 시기였음.
- 군인으로서 일자리를 잃은 사무라이들은 경찰이나 교사가 됨. 당시 일본 경찰이나 교사가 칼차고 군인처럼 행동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의무교육:
- 공장 노동자에게는 근면과 성실, 규칙에 대한 순응을 체화할 것이 요구됨.
- 4년제 초등교육을 의무화. 소년을 국가 인재로, 소녀를 현모양처로 교육.
- 웃기지도 않은 소리지만 이때 만들어진 현모양처 신화는 지금도 이어짐.
- 현모양처는 현명한 어머니이자 좋은 처일 뿐만 아니라, 덴노에게의 충성이 핵심.
- 덴노는 아버지이고, 국민은 덴노의 자녀라는 세계관이 구축.
- 이것은 전근대 시대의 평민-다이묘 관계와 같음.
- 호주가 가족을 지배하는 일본의 호적 시스템은 한국에도 이식되었음.
- 교육의 재정 문제는 지방세로 충당, 납세자들의 폭동과 방화 발발.
- 의무교육 시행 후 10년은 실제 취학률이 낮았으나, 1900년대에는 95%에 달함.
- 개인의 인생에서 능력과 노력에 따라 공정하게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관념이 정립됨.
- 정치질서와 덴노:
- 덴노의 정치적 위상이 변함.
- 일본의 사회적 합의와 권력의 정당성 확보는 선거가 아니라 덴노를 통해 실현됨.
풍요로운 국가 만들기
- 정치 지도자들이 해외순방을 하며 유럽 국가의 군사력과 그 상부구조로서의 경제력을 체감.
- 부국강병을 국가의 지상 목표로 채택. 산업경제 인프라와 정부주도 광산/공장 건설.
- 조세 제도, 지조 개혁:
- 1870년대의 가장 중요한 경제 개혁은 조세 개혁.
- 지조개정 조례:
- 토지에 대한 세금을 해당 토지의 수확량이 아닌 원가에 따라 고정적으로 과세.
- 토지 소유자와 국가의 경제적 관계가 현물납에서 금전납으로 변모하며 근대적인 토지 관념 형성.
- 지조 개정 이후 대부분의 농민들은 소작농이 됨. 지주-소작농 관계가 이때 구축됨.
- 정부와 개인(남성)의 직접적인 경제 관계의 변화:
- 과세를 통해 개인은 국가와의 긴밀한 경제, 정치적 관계를 실감함.
- 세금과 국가 재정의 관계에 대한 논란이 정치적 쟁점으로 부상.
- 제도정비:
- 조세수입으로 산업 인프라 구축을 위한 공공사업: 전신환, 우편, 중앙은행
- 철도 부설, 철도로 인해 시간의 엄밀성에 대한 개념이 정립.
- 민간 투자가 결핍했고, 외국자본의 유입을 우려해 정부 주도 산업체를 설립.
- 조선, 광산, 방적 등 사업을 국가 시험 사업으로 운영.
- 일본 국내에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외국인을 고용함.
- 제국대학에서 외국인 교수들이 강의, 제대 출신 일본인들은 고등학교에서 강의.
- 서구 열강의 기술과 제도가 체계적인 교육으로 일본에 스며듦.
- 국영 기업은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림. 하지만 산업 경험을 축적하고 기술자와 노동자를 양성함.
세계에 대한 일본의 태도
- 일본 사절단은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려 했음:
- 하지만 서구적 외교 질서에 미숙해 실패.
- 이를 계기로 일본의 법률과 제도를 서구적 표준에 맞게 바꿈.
- 메이지 지도자와 지시인들은 아시아에 대해 이중적 관점을 가짐:
- 서구에 맞서기 위해서는 아시아가 연대해야 한다. (아시아주의, 홍아론)
-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가 되어야 한다. (제국주의)
- 당시 조선은 일본의 불안한 정세를 인지하고 메이지 유신 정부와 거리를 두고 있었음.
- 일본 내에서는 무사들의 불만이 폭주하고 있었음:
- 무사들은 자신이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장 세상이 바뀌니 설 자리가 사라짐.
- 유신 3걸 사이고 타카모리도 불만을 가진 무사였음.
- 사무라이의 불만은 정한론으로 이어짐. 사이고는 무사들에게 전쟁터가 필요하다고 주장.
- 하지만 유신 3걸 오쿠보 도시미치는 전쟁을 반대하고 산업화를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
- 정치적으로 패배한 사이고는 낙향하고, 오쿠보가 메이지 정부 최고 권력자가 됨.
- 정한파 무사들의 반란이 줄줄이 이어지자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타이완을 침략.
- 침략의 근거는 타이완에 표류한 류큐 주민들이 살해당한 사건, 당시 류큐는 일본의 완전한 영토로 편입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명분에 불과했음.
- 일본은 문명국으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미개한 타이완을 계도해야 한다고 주장.
- 하지만 영국과 미국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말라리아로 인해 심한 병력 손실만 봄.
참여와 저항
- 메이지 유신은 서구와 달리 소수의 사무라이가 일으킨 위로부터의 혁명:
- 서구의 계급 혁명과 비교하면 이것을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심스러움.
- 다만 메이지 유신의 주체는 빈곤한 중하위 무사들이었기에 혁명이라고 볼 수도 있음.
- 메이지 유신은 민중에게 막대한 세금을 부과하며 진행됨:
- 민중 불만이 고조되며 폭동과 방화가 이어짐, 군대가 투입되어 진압.
- 이 시기 군대는 국민을 보호하고 외부의 위협에 맞서는 군대가 아니라 국민 통제를 위한 군대.
- '말 잘 듣는 국민’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
정치 담론과 논쟁
- 막부 말기부터 정치 참여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음:
- 페리 내항을 둘러싼 의견 제출, 농촌의 정치 의식 배양.
- 에에자나이카도 민중적 정치참여라고 볼 수 있음.
- 1870년대 일본 계몽운동:
- 신문: 헌정 제도 내에 의회와 민의를 대변하는 위상을 갖게 됨.
- 많은 서적이 출판됨: 실용학문, 자유롭고 비판적인 탐구, 독립성과 기회균등 정신.
- 세계가 반문명과 문명으로 이분되어 있으며, 일본은 문명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
- 개인주의와 주권의식의 성장, 정치 참여가 확대되며 향후 자유민권운동으로 이어짐.
- 헌법의 필요성이 제기:
- 1870년대 초반에는 강한 국가를 위해 민중을 통제하고 동원하는 기본법으로서 헌법이 논의됨.
- 한편 자유민권운동도 헌법 제정과 의회 설립을 탄원하며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됨.
- 이타가키 다이스케: 민선의원설립건백서.
- 정한론 주장하다가 낙향한 무사 출신. 군사 반란을 모의하던 다른 무사들과 달리 정치 운동.
- 자유당 창당, 정치조직과 그 하위 조직을 구축함.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
- 엘리트층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도 의회 설립을 주장.
- 대중적인 정치 교육: 유키치 게이오 대학교, 오쿠마 시게노부 와세다 대학교.
- 전국 각지에서 청원운동이 일어나고, 자유당, 입헌개진당, 입헌제정당 창당.
- 1881년 정변:
- 파벌이 나뉨: 국회 반대 vs 영국식 정당내각제 vs 프로이센식 비정당내각제
- 사쓰마, 조슈 양파가 오쿠마를 강제로 추방하고 덴노에게 국회 개설에 대한 조서 발표를 제안.
- 결국 1890년에 덴노가 10년후 프로이센식 비정당내각제를 도입할 것을 발표.
- 사실 메이지 신정부도 어렴풋이 국회 개설을 향한 흐름을 막을 수 없음을 감지함.
- 이미 1878년 자문기관으로서 지방의회를 설치했음.
- 단, 참정권은 없고 농촌 지주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
- 억압적인 검열제도를 도입하고 보수적인 헌법 제정으로 방향이 결정됨.
- 여성 참여:
- 여성 단발 금지령, 여성의 정치 조직 가입 금지, 여성의 정치 집회 참여 금지.
- 호적 제도로 남성 중심 사회가 공고히 유지.
- 쓰다 우메코: 이와쿠라 사절단에서 영어 통역 담당, 귀국 후 쓰다주쿠 대학 설립.
- 지식인 여성들이 불량, 문란한 여성으로 취급됨.
사무라이 반란과 농민봉기, 신흥종교
- 사쓰마 번은 무사의 비율이 20%에 달할 정도로 무장된 도시였음.
- 폐도령과 서구화, 특권 폐지, 사민평등, 정한론 패배 등으로 무사들의 불만이 증폭.
- 사관학교를 만들고 중앙정부에 세금을 내지 않는 반정부적 행태를 보임.
- 사가의 난, 진푸렌의 난, 아키즈카의 난, 하기의 난 등 연쇄적으로 반란이 일어남.
- 결국 세이난 전쟁(1877년)으로 이어짐.
- 1877년을 기점으로 사무라이들의 무장 반란은 사라지고, 무사들이 자유민권운동에 참여.
- 농민 봉기:
- 1880년대 초, 풍년으로 디플레이션 발생. 많은 농민들이 가혹한 세금을 납부하지 못함.
- 농민들은 세금을 체납하고 농토를 압류당함. 농촌이 대부분 지주-소작 관계로 재편.
- 지치부 사건: 농민 불만이 폭발, 자유당의 농촌 지부가 무장 봉기. 자유당 해체 엔딩.
- 농민은 조직화가 쉽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봉기가 일시적인 혼란으로 끝나게 됨.
- 신흥 종교:
- 텐리교, 금광교: 불평등한 사회경제 체제에 대한 분노.
- 혁명으로 이어지지는 않음.
조약 개정 문제와 내정
- 자유민권운동은 10년 후 의회를 만든다는 약속으로 진정이 됨.
- 하지만 외교 문제는 메이지 신정부에게 큰 위협이었음.
- 조약 개정 문제는 전국적인 관심사였음. 이제 일본은 국민 국가이기 때문.
- 존왕양이 정신은 인민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정치 제도와 부국강병할 수 있다는 신념의 결합.
- 1889: 외무경의 교섭으로 조약 개정 시도:
- 관세자 주권과 치외법권 철폐. 그 대신 내지잡거 인정, 서양인 판사 임용.
- 서양인 판사 임용은 자유민권운동에 다시 불을 붙임. 자유당과 입헌개진당이 부활.
- 자유민권운동을 대표하는 오쿠마와 외무경이 교섭:
- 서양인의 판사임용을 대심원에 한정하라. 그 외에는 모두 인정.
- 오쿠마는 외무대신으로 임명되었으나 극우 단체에게 테러를 당해 다리를 잃고 사임.
- 1891: 영국을 상대로 치외법권에 국한해 교섭:
- 오쓰 사건(일본인 경비원이 러시아 황태자 살인미수)이 일어남.
- 덴노까지 나서서 러시아에 사죄. 정부는 쓰다를 사형에 처하고 싶어했음. 하지만 법적 근거 없음.
- 법원은 철저히 법치주의에 입각해 판결. 서구 열강으로부터 근대적 사법 체계를 갖췄음을 인정받음.
- 1894: 영국을 상대로 치외법권 회복.
- 1911: 미국을 상대로 관세권 회복.
- 불평등 조약의 완전한 개정.
- 서구 열강으로부터 그들의 일원으로 인정.
메이지 헌법
- 국회 개설을 위한 정부의 준비:
- 이토 히로부미의 유럽 유학, 1888년 프로이센 헌법에 기반한 헌법 초안 완성.
- 추밀원의 심의. 추밀원은 헌법 제정 후 초헌법적인 자문기구가 됨.
- 메이지 헌법은 덴노가 모든 시스템을 총괄하도록 규정. 하지만 덴노를 위한 행정 기구는 없음.
- 군인칙유: 군대의 편성, 통수권을 덴노에게 부여. 반정부 세력으로부터 권력 수호.
- 화족령: 일본에도 귀족이 있나요? 고대 일본에 있었음. 하지만 유명무실. 그 귀족 가문을 다시 인정.
- 태정관제의 폐지와 내각제 도입:
- 메이지 유신은 본질적으로 왕정복고임.
- 내각제는 덴노를 보필하는 역할로 규정. 덴노가 총리와 장관을 임명.
- 지방자치제의 제정: 시제, 정촌제, 부현제, 군제 공포.
- 납세액에 따른 등급선거제, 지방 자산가를 지방의원으로 선출.
- 의회에 대한 예행 연습인셈. 여기서 정치적 경험을 쌓아 향후 중의원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함.
- 메이지 헌법의 성격:
- 강한 군권과 약한 민권. 프로이센식 헌법.
- 흠정헌법: 덴노가 국가의 주권자이며, 통수권, 긴급칙령권, 외교권 등 모든 권리를 가짐.
- 양원제 의회에서 중의원은 예싼심의원을 제외하고는 귀족원과 동등.
- 의회의 법률제정권과 예산승인권을 견제하기 위해 긴급칙령권과 저년도 예산집행권 부여.
- 내각 대신은 덴노가 자유롭게 임명, 의회나 국민이 아닌 덴노에게만 책임을 진다.
- 정당 내각제를 부정하려는 의도. 정당의 당수가 수상이 될 수 없음.
- 일본은 덴노의 국가, 덴노의 군대, 덴노의 경찰.
- 군 통수권 독립: 군지휘권은 내각 보필의 틀 밖에 높음.
- 선거제도:
- 선거는 지방 의원을 대상으로만 적용됨.
- 1889년: 25세 이상, 납세 15엔 이상 남성. (인구 1.1%)
- 납세 기준이 사라진 것은 1919년. (인구 5.5%)
- 연령이 20세로 낮아지고 여성의 투표권이 보장된건 1945년. (인구 50%)
사회/경제 문화의 변용
- 1890년대의 산업혁명:
- 섬유산업과 해운업이 유럽과 경쟁 가능한 수준으로 발전.
- 소농의 몰락, 토지를 압류당하고 대부분 소작농으로 전락.
- 농촌에서 도시로 온 여성들은 유곽으로.
- 서구식 근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문화적 상실감 발생:
- 서구 문화를 동경하다보니 이제 일본의 전통 문화는 천박한 것으로 취급됨.
- 위기감을 느낀 지식인들은 '일본만의 전통’을 급조. 서구식으로 근대화될수록 전통을 강조함.
- 관료들은 사회적 무질서와 정치적 도전에 대한 두려움으로 개인을 억압하려 함.
- 마쓰카타 디플레이션:
- 1881년 정변으로 오오쿠마가 실각, 긴축론자 마쓰카타가 취임.
- 기존에는 정부의 재정 확보를 위해 화폐를 찍어냄. 이로 인해 물가가 오름.
- 마쓰카타는 경제 위기 극복 방안으로 태환 제도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적 화폐 제도를 시행.
- 긴축 재정으로 재정잉여가 축적되고, 불환지폐를 소거해 태환제도를 확립함.
- 디플레이션으로 쌀값이 급락하며 농민의 수입이 감소함:
- 이로 인해 다수 농민이 토지를 상실하고, 대지주를 중심으로 토지 소유권이 재편됨.
- 1945년 이전 일본 농촌의 기본 구조였던 기생지주제가 형성되는 계기:
- 기생지주제란, 지주가 마름과 소작농에 기생해서 산다는 말.
- 일본은 명확한 지주사회. 지주의 마음만 사로잡으면 되므로 정치가 쉬워짐.
- 지주들은 도시로 이주하고, 농촌의 자기 토지에는 마름을 둠.
산업혁명
- 디플레이션으로 화폐가치가 회복되며 금융제도가 확립됨.
- 기업이 발흥하며 방적업과 철도업이 성장. 민영철도가 국영철도를 능가할 정도.
- 1890년 일본 최초의 자본주의 공황 발생. 역설적으로, 공황이 일본의 근대화되었음을 방증함.
- 재벌의 출현:
- 미쓰이 그룹: 은행(미쓰이 은행), 광업(마이케 광산), 무역(미쓰이 물산)을 중심으로 성장.
- 미쓰이는 원래 1670년 이래 교토에서 포목점을 운영함. 성공하여 에도로 진출.
- 유신 후 신정부에 적극 가담했고, 조세징수 업무를 위탁하여 큰 돈을 벌었음.
- 미쓰비시 그룹: 얘네는 원래 평민이 아니라 무사 출신.
- 해운업을 하던 중 유신이 일어남. 여기에 편승해 해운 보험과 광업에 진출.
- 재벌의 성공요인:
- 국가적 지원과 선도: 국가경쟁력 증진을 위해 신산업에 지원 집중, 해운업 보조. 중공업 육성.
- 저임금 시장에서의 인력충원.
- 시부자와 에이치: 기업보국, “돈버는 것이 애국이다”, 일본식 기업가 젓인.
노동인구와 노동조건
- 여성노동:
- 남성 노동자의 심각한 임금격차: 50-70% 수준, 중공업은 30-50% 수준.
- 가혹한 노동 환경에서 높은 결핵 발병률, 근무시간은 평균 12-14시간.
- 건강이 악화되면 공장에서 해고되고, 고향에서도 배척됨. 결국 유곽으로 향할 수 밖에 없음.
- 농촌 여성과 비교하면 조금 더 자유로운 면도 있엇음.
- 여성과 달리 남성 노동자는 숙련공화되어 나중에는 자기 공장을 세울 수도 있었음.
- 20세기 초 치안경찰법의 제정으로 노조 결성이 불법화됨.
교육의 보조
- 정부에 순종하는 것이 도덕적인 것으로 교육.
- 일본의 도덕은 유교적 핵심가치(충효)로부터 출발.
- 덴노와 그 조상들에게 충효를 다해야 한다고 교육.
- 덴노에 대한 충효를 강조하는 유교 가치와 덴노가 곧 국가라는 내셔널리즘을 결합.
- 궁극적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을 정당화. 이런 시스템은 현대 일본에서도 작동함.
- 한편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음:
- 지식인 사이에서는 덴노의 신화가 가상이라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
- 엘리트 사이에서는 어느정도 자율성과 개인주의가 보장됨.
- 하지만 엘리트가 되려면 돈이 있어야.
- 1872년 학제는 의무교육 8년:
- 진짜 그랬을까? 법령만 그랬음. 실질적인 의무교육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음.
- 이후 1880년에는 3년이 되었고, 이때까지는 리버럴 교육을 함.
- 하지만 그 뒤로는 국가주의 교육이 이뤄짐.
- 1947년이 되면 미국식 민주주의를 교육.
문화와 종교
- 군대는 근대 문화 교육의 장: 군대에서는 서구식 의복을 입힘. 군가는 서구식 음악.
- 1880년대 후반, 서구화에 맞선 전통적인 일본 문화 보존 운동.
- 전통의 발명: 유도와 스모를 일본 전통 무술로 탈바꿈, 노의 의례화, 예능 분재 등.
- 근대화 시대에 정신적 가치를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형성.
- 제한적인 종교 자유 허용:
- 그리스도교: 교리상 국가에 반하는 양심을 거론하며 국가와 대립. 사회주의와 노동운동 추동.
- 신기관을 설치해 종교를 관리. 신사를 국민 의례 거행 정부기관으로 공식 지정.
- 서구는 일본에 국교가 있는게 아닌지 의심. 의심을 피하기 위해 신기관을 내무성 산하로 이관.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와
- 메이지 시대의 급속한 변화는 해방과 성공, 국민적 성치 가능성을 제공.
- 한편으로는 위험과 타락, 도덕 가치의 상실, 정치적 혼란에 대한 공포가 공존했음.
- 젠더의 무질서에 대한 공포도 만연해 여성의 정치 참여를 제한함.
- 현모양처의 이상을 구현.
- 유교적 전통이 아니라 근대 일본에서 창조한 관념.
- 여성의 역할을 자녀 양육으로 제한하고, 여성을 정치적, 법적으로 배제.
- 여성을 현모양처로 교육, 가정에서 여성의 국가 봉사를 평가.
- '우리 일본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문화적 관심으로 표면화됨.
- 겐로는 덴노의 권위 격상으로 정치 공포를 해소하고자 함.
- 서양의 기술을 이용하되, 일본적 가치가 고양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발전.
- 일본의 가치를 미적, 도덕적 감각으로 여성적 가치로 규정.
- 일제강점기 때 조선인 여성과 일본인 남성을 모델로 만든 프로파간다가 많았다는걸 생각해보자.
제국과 국내질서
- 일본은 원래 조선을 협력 관계로 생각함.
- Q. 강화도 조약 때 이미 조선 침략 계획이 다 세워져 있었나?
- Q. 메이지 유신 초기 정한론자들이 침략 결정에 영향을 미쳤나?
-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해 제국주의적인 관점으로 접근을 공표.
- 동학혁명과 청일전쟁, 전쟁 배상금으로 국방, 제철, 조선, 해운 성장:
- 일본 입장에서 청일전쟁은 제국주의 전쟁의 첫 승리.
- 국민적인 승리감 고취, 배상금도 받고 영토 확장도 했으니 얼마나 좋겠어.
- 청일전쟁은 일본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적극적으로 확장하는 효시.
- 영일동맹과 러일전쟁.
-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 간 요인:
- 일본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토착 정서: 국학, 미토번 학자에 의한 일본 중심 세계질서관.
- 지정학적 경쟁
- 무역과 투자의 확대
제국, 자본주의, 국가건설의 배경
- 일본 엘리트들이 추진한 상호연관된 세 프로젝트: 제국주의, 산업혁명, 국가건설.
- 하지만 세 프로젝트는 예기치 못한 정치적 혼란을 초래함:
- 제국주의: 청일, 러일 전쟁으로 가두시위와 행진, 대중집회에 정당성이 부여됨.
- 산업혁명: 임금노동자 계층이 확대되면서 정치 소요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함.
- 국가건설: 헌법에 의한 의회 구성은 집회와 시위를 발전시키고, 서민들의 참정권 주장을 뒷받침.
- 격동의 의회정치:
- 중의원은 대부분 지주 출신과 도시의 전문직 종사자. 30%는 사무라이 출신.
- 귀족원은 황족과 고액납세자, 천황의 임명을 받은 전직 고급관료, 갑부, 다이묘 출신.
- 초기 의회 정치의 쟁점은 국가대사와 민생의 충돌: 부국강병하려면 민중을 더 수탈해야.
- 의회를 중심으로 정치적 불만이 폭발할 때 청일전쟁이 발발.
- 청일전쟁으로 국내 정치 문제는 한번에 정리됨. 전국민이 우경화되는 현상.
도시 민중 소요의 시간
- 러일전쟁은 청일전쟁과 달리 일본에 많은 부채를 떠안게 만듦.
- 일본이 승리했지만, 막대한 군비와 사상자가 발생, 할양받은 남사할린도 큰 가치가 없는 땅이었음.
- 포츠머스 조약에 따라 기대한 전쟁 배상금도 받지 못함.
- 이에 따라 러시아와의 강화를 반대는 국민적 분노가 폭발함.
- 제국과 덴노를 지지하고 민의를 무시하는 덴노의 대신을 규탄하는 민중 반란 발발.
- 1901년 사회주의 정당 사회민주당이 창당됐고, 1911년에 대역 사건이 일어남.
- 1905년부터 1918년까지 도쿄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유혈사태가 일어남.
- 대중 폭동은 겐로(군부, 관료)와 정당정치인의 연대를 촉진함.
내셔널리즘의 조성
- 20세기초부터 내무성, 육군, 문부성 주도로 국가의 부품으로서의 국민을 양성.
- 내무성은 중앙통제를 위해 지방 행정 및 경찰의 대대적 개편을 단행.
- 76000여개의 작은 마을들을 12000여개로 통폐합.
- 19만개의 신사를 12000여개의 관인 신사로 통폐합.
- 육군성은 재향군인회를 창설, 1918년에는 200만명 규모.
- 문부성은 의무교육기간을 2년 연장하고, 청년회를 개조.
- 사회질서를 강화하고 각 지방을 중앙정부와 연결.
- 연장자, 남성, 지주, 상급자, 덴노와 국가와의 관념을 강화.
- 실효성이 있었을까? 정책을 한다고 한 세대만에 의식이 바뀌지는 않았음.
경제와 사회
-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전시 호황. 대유럽 수출이 폭증:
- 나리킨(벼락부자)들의 출현.
- 부작용으로 물가가 폭등함.
- 이 시기 일본은 대중문화가 꽃 피우고 출판업계가 활황이었음:
- 신중산층(임금노동자, 상점주인, 대기업 사원 등. 제국이 바라는 일본인의 표상.)의 출현.
- 신중산층을 중심으로 교양을 쌓기 위한 저렴한 도서가 유통됨.
- 제국을 일으켰다는 자부심과 현대적 일본의 삶을 향유한다는 참여의식 고양.
-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불황이 시작됨:
- 주요산업가치는 1년만에 40% 하락, 수출품이 고가격화되면서 엔화 가치 절하가 필요해짐.
- 해결책: 국낸 물가를 낮춰 수출 경쟁력을 회복하자! 긴축과 절약.
- 1923년 간토 대지진 발생:
- 재건붐: 긴축 노리보다는 넉넉한 은행 대출 장려.
- 1927년 금융공항, 은행수가 절반으로 감소.
- 4대 재벌기업이 자급자족적 배타적인 집단으로 자리 잡음.
- 일본 산업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부와 소득의 불평등을 야기함.
- 재벌은 기업의 자율성을 요망했지만, 민주적이고 리버럴한 정치를 지지한 것은 아님.
농촌생활
- 원래 지주-소작 관계를 안정적이었음.
- 지주는 제국의 기둥. 한편, 농민들은 소작료와 변화무쌍한 상품 가격에 대처할 수 없었음.
- 소작농은 지주의 온정에 의존해야 했음. (명확한 위계질서)
- 1910년대부터 1920년대가 되자 변화:
- 지주들은 도시에서 살고, 농촌에는 마름이 농지를 관리.
- 마름은 온정을 베풀 의무가 없었음.
- 이제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는 온정이 아닌 경제적 대립관계로 변모.
도시생활
- 간토 대지진 이후 도시를 재건하면서 현대적인 계획 도시를 실현할 수 있었음.
- 구중산층: 대다수의 상점주인과 도매업자, 소규모 제조업자, 적은 보수를 받는 임금노동자.
- 신중산층: 고등교육을 받은 직장인, 대기업이나 정부 관청에서 일하는 임금노동자들.
- 기업의 인력수요와 교육제도의 확장으로 신중산층이 도시의 주역으로 떠오름.
- 여성 노동:
- 저임금, 불안정. 여성에게 보장된 최소한의 자유는 노동쟁의.
- 노동으로 가족과 국가에 기여한다는 인정을 받고자 하기도.
- 노동자의 유동성:
- 이직은 승진전략의 일환. 노동자의 최종 목표는 독립 회사 설립.
- 1920년대 사용자들의 숙련공 확보를 위해 공장위원회를 설치해 이직을 막으려 함.
- 실제로 장기고용이 실현되지는 않음. 그런데 1930년대 중반 군수산업을 위해 국가주도로 실현됨.
- 1945년 종신고용을 보장받았던 노동자들은 모두 실업. 그러다 한국전쟁으로 다시 고용이 보잠됨.
- 21세기 초반까지 이어진 일본의 종신고용 문화는 1950년대에 형성된 것. 오래된 전통이 아님.
- 도시의 주변부:
- 재일조선인과 부라쿠민.
- 간토 대지진 당시 엄청나게 많은 재일조선인이 살해됨.
사회변화에 따른 문화적 대응
- 이 당시 문화생활의 상징어는 합리성, 과학, 문화, 밝다, 새롭다.
- 중산층의 생활은 전원도시와 문화주택, 통근열차, 백화점.
- 샐러리맨의 등장, 소박한 지식노동자, 친숙한 도시락계층(고시벤).
- 모던걸과 모던보이:
- 모던보이: 정치적 급진주의자, 신인회나 맑스-레닌주의에 경도된 남성.
- 모던걸: 사무직 근무하며 근대를 향유하는 여성, 여성 참정권 지지, 문란한 이미지로 소비.
- 문화생활에 대한 열광 이면에는 빈곤과 투쟁, 사회적 무질서가 있었음:
- 교수는 양복입은 빈민, 자식인들이 사회주의에 경도되는 경향.
- 공장 노동자들의 정치 의식화, 조직화.
- 도시이주자들은 정신적 버팀목으로 신흥종교내지는 사이비 종교에 빠짐.
- 1910년대와 1920년대 위기:
-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기회와 생활의 불안정성은 더 커짐.
- 시장의 충격은 국가, 지방 엘리트의 온정만으로 완화하지 못함.
- 사람들은 공공생활에 참여하며 국가적, 전지구적 차원의 제국주의 열강에 일체감을 가짐.
- 많이 사람들이 과거를 향수함:
- 사회주의자와 모던걸에 대한 비판, 노동자와 농민 쟁의에 대한 언론 보도는 불안감을 고조.
- 옛 공동체 상실에 대한 불안감으로 사회적, 문화적 충돌이 발생.
- 농민과 노동자들은 온정에 근거한 전통보다는 정치적 권리를 주장.
전간기 민주주의와 제국
- 다이쇼 데모크라시(1905-1932):
- 천황제 민주주의, 지금보면 전혀 민주적이지 않음.
- 하지만 일본의 근현대사에서 보면 가장 민주적인 사회였음.
- 메이지 헌법에 따라 입헌정치가 단생:
- 다수당이 되어도 당수가 총리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었음. 덴노의 인정이 필요.
- 헌법질서에서 군주의 적극적인 역할을 규정.
- 이데올로기의 도전:
- 정치 테러를 인정하는 사회. 왜? 메이지 유신 자체가 정치 테러로 시작되었기 때문.
- 정치 테러를 변화의 도화선으로 받아들임. 의인의 정의 구현을 위해서라면 폭력을 용인.
- 빈번한 백색테러: 흑룡회는 덴노에 대한 맹목적 충성으로 대중적 인기를 끄는 수상을 암살.
- 기타 잇키: 덴노숭배와 사회주의적 경제 평등 주장. 반의회주의.
- 아나키즘과 공산주의의 확산, 대중노선과 전위조직의 양립.
- 페미니즘:
- 여성중심 페미니즘(?): 어머니로서의 여성, 모성 강조, 여성중심사회 지향.
- 인도주의적 페미니즘:
- 일본인이 아닌 세계인으로서의 여성해방.
- 젠더와 계급 이중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주장, 사회주의적 경향.
- 정당 정치 비판: 대의정치 지지자의 현실정치 비판.
-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통치 전략:
- 정당은 지배 엘리트와 결탁. 사회경제적 배경도 같고, 혼인으로 얽힘.
- 민주주의는 목적이 아닌 덴노와 제국의 사회질서를 보장하는 수단의 일종.
- 정당 중심 의회의 대의민주주의는 동의, 하지만 경제 민주화와 덴노에 대한 공격에는 단호한 대처.
- 제철소 총파업과 조선인 학살, 아나키스트 학살에 공권력이 동원됐을 때 의회는 침묵.
- 외교:
- 외교 정책에 있어 정당 정치인과 군부 사이에는 기본적인 합의가 있었음:
- 중국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합의. 그 방법에는 서로 차이가 있었음.
- 각종 현안에 유연하게 대처. (3.1 운동 이후 문화통치 등.)
- 1920년대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 일본의 지도자는 민주주의보다는 제국과 덴노를 선택.
- 공황과 국제적 긴장 시대에 협조적인 국가보다는 배타적인 제국주의를 선택.
- 권위주의 정치를 강화하게 위해 의회정치의 민주적인 방식을 포기.
쇼와 공황과 다양한 대응
경제와 사회의 위기
- 1929년 미국발 세계공황이 발생. 지금과 달리 그때는 공황이 순식간에 다른 국가로 퍼지지는 않음.
- 일본은 심각성을 제때 파악하지 못하고 기존 경제 정책을 그대로 시행:
- 1930년 금본위제로 복귀, 세계적인 디플레이션이 일어나며 그 효과가 상쇄됨.
- 고정환율제로 환율인하도 없는 상황, 엔화를 평가 절하하기 위해 달러를 사재기.
- 농산물의 가격 폭락으로 소작쟁의가 급증. 기업인 대상 암살 발생.
- 도시 노동자 임금이 인하되면서 구매력이 저하되고, 이로 인해 소매 업계가 파산.
- 모던 걸의 이미지가 카페와 댄스홀의 웨이트리스로 변화:
- 사회는 여성들의 성노동을 생계 유지가 아닌 욕망추구 방식으로 인식.
- 1930년대 일본사회의 중심 키워드는 여성과 계급.
- 미국에 비해 일본의 공황은 경미했으나, 위기 의식이 광범위하게 퍼짐.
- 공황 이전 의회정치에 대한 실망감과 공황에 따른 위기 속에서 새로운 정치를 모색.
난국 타개, 해외에서의 새로운 전개
- 정당과 자본주의 엘리트가 덴노와 민의를 가로막는 적으로 인식됨. 군에 대한 기대감 상승.
- 군부는 중국을 무대로 전쟁을 벌이면 경기가 단숨에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음.
- 만주침략:
- 관동군 작전참모 이시하라 간지: 일본과 미국의 세계최종전쟁론을 주장. (종교적 망상에 가까움.)
- 세계최종전쟁을 위한 아시아의 통합을 주장하며 만주에서 그 실험을 해야한다는 생각.
- 남만주 철도 폭파로 만주사변이 발발, 괴뢰국 만주국을 건설.
- 만주사변은 표면적으로는 영관급 장교들의 음모와 명령 불복종으로 일어남.
- 하지만 군 수뇌부와 문민지도자들도 관동군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돌발적인 사태는 아님.
- 만주국은 국가주도의 경제발전 실현을 위한 새로운 전략 고안의 실험실로 간주됨.
- 식민지배의 전략 변경:
- 식민지 조선과 대만의 지역안정과 이익추구를 계획.
- 식민지는 팽창하는 제국을 지원하기 위한 인적, 물적 자원의 동원을 위한 장소가 되어야.
- 이러한 총동원 체제의 맥락에서 개발투자를 확대하고 내선일체 프로그램을 강요.
새로운 사회, 경제 질서
- 1930년대 경제적 도약, 경제 전반에서 50% 성장.
- 1937년 중앙정부예산의 3/4는 국방예산. 군수산업에 경제 집중.
- 무산계급을 대변하는 사회대중당의 등장:
- 사회주의 정당은 아니지만 무산 정당을 규합해 의석을 확보.
- 그런데 사회대중당은 군부와 유착 관계가 있었음. 기정정당과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이 공통점.
- 집세 억제, 공과금 인하, 노동자 권리 보장 등을 위한 법 제정을 요구하는 한편…
- 일본의 만주 지배와 중국 전체 지배를 서구에 대한 민족자결의 대의를 이루는 것으로 동의.
- 군부 세력의 확대:
- 황도파: 존황토간, 반공주의, 전체주의, 재벌 해체, 친서방, 반소련 주장.
- 통제파: 전체주의, 국수주의, 친기득권, 귀족주의, 반영미, 친소련 주장.
- 황도파가 중앙에서 신임을 잃고 2.26 사건등으로 자멸하면서 통제파가 군국주의 체제를 수립.
- 사상 통제:
- 미노베 다쓰키치: “덴노는 신이 아니라 기관일 뿐이다.”
전시의 일본
- 중일전쟁의 발발. 일본은 축제 분위기.
- 중국 입장에서 중일전쟁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국공합장으로 맞선 항일민족해방 전쟁.
-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관동군이 북진을 단념하면서 여론이 악화됨.
- 난징 대학살은 항복을 강요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
- 일본은 중국 지배를 승인받기 위해 영미를 회유하고 소련과의 긴장을 완화.
- 1940년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삼국동맹이 체결되며 미국와 확실히 대립하게 됨.
- 미국의 경제제재로 군부 강령론이 분출됨. 일본 군부는 도죠 히데키로 권력이 집중.
- 1941년 쇼와가 출석한 어전회의에서 미일교섭이 결렬되면 개전하는 방침을 결정.
- 미국은 만주사변 이전으로 모든 영토와 주권을 되돌려 놓으라고 요구.
- 결국 태평양 전쟁을 결정.
- 태평양 전쟁:
- 진주만 공습으로 전쟁 발발.
- 전쟁의 논리는 동아신질서와 대동아공영권.
- 일본은 전쟁에서 보급선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함. 군비가 부족했기 때문.
- 현지 조달이라는 명목으로 보급없이 전장에서 자급자족할 것을 강요.
- 총력전:
- 과거 전쟁은 군대만의 이야기. 정치, 경제, 문화는 전쟁과 분리됨.
- 현대전에서는 비행기의 등장으로 전방과 후방의 경계가 사라짐.
- 오늘날 전쟁은 모두 총력전. 전 사회가 전쟁을 위한 체제가 된다.
- 1938년 국가총동원법: 의회 승인없이 정부가 인전, 물적 자원을 동원하고 통제.
- 경제개혁: 산업마다 카르텔을 결성, 공급을 통제, 정부 관료와 재벌기업의 결탁.
- 노동개혁: 산업보국연맹 출범, 직업 변경 금지, 종신 고용 약속, 최저생활임금 제공.
- 농업통제: 지주의 쌀은 저렴하게, 소작농이나 자작농의 쌀은 비싸게 설정, 지주의 영향력 약화.
- 여성노동: 12-39세 여성 노동 정신대. 가족제도 강화를 위해 여성 노동을 반대하는 입장도.
- 정치신체제 운동: 고노에 중심의 일국일당 수립. 나치로부터 영향.
- 전시 일본인의 생활:
- 국방비가 국민총생산의 30%에 달했음.
- 근대적 초극:
- 서양문화에 대한 공격, “서양의 헤게모니를 극복하기 위해 아시아 해방 전쟁을 하자”
- 반근대주의: 서구식 근대를 반대. 서양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생각.
- 서양의 영향을 동아시아에서 추방, 영미영화 금지, 모던걸로 상징되는 향락을 비판.
- 이 모든 것은 일본 스스로 근대화되어 있다는 전제, 전통의 상실감으로부터 출발.
- 종전:
-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
- 이틀 뒤 소련의 참전, 만주를 시작으로 한반도 38도선까지 진격.
- 8월 14일 어전회의에서 항복 결정.
점령하의 일본
- 패전 직전 2주간 쉴세없이 문서를 소각함. 장교 350명은 자살.
- 미국의 전략은 비군사화와 민주화:
- 미국은 일본 군국주의가 소수의 권력 독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
- 비군사화: 군대 해산, 특별고등경찰 등 전쟁 지원 집단 해체, 20만명 공직 추방, 국가신도 폐지.
- 민주화:
- 부의 재분배, 미국 권리장전 기반 시민 자유 보장, 미국보다 더 자유로운 정치 표현 인정.
- 재벌 비판과 노동조합 결성 장려, 농지 개혁, 의무교육 9년으로 연장 등.
- 통전기체제의 연속성:
- 일본 정부 관리와 전시 엘리트들의 저항으로 SCAP의 개혁은 쉽지 않았음.
- 대신 SCAP의 정책을 계승하는 형태로 농지개혁과 노동개혁.
- 여성 권리 강화, 재벌 해체 추진.
- 점령정책의 전환:
- 일본의 공산화에 대항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만들기 위해 정책이 전환됨.
- 전쟁 보상 철회, 재벌 해체 철회, 노동자 파업 불법화.
- 경찰청 창설, 재무장 추진, 추방했던 공직자들의 복귀, 전시 관료들의 사면.
- 장기적으로 보면 안정화를 위한 것, 하지만 동시에 반동적인 변화.
- 현대 일본의 담론이 형성된 시기.
참고자료
- 앤드루 고든, “현대일본의 역사”, 김우영 역, 이산,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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