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해방 직후사』
정병준, “1945년 해방 직후사”, 돌베개, 2023
고립된 조선총독부와 무능한 미군정, 그리고 친미-반공-기독교-엘리트 한국인들이 빚어낸 역사. 한국의 보수주의가 이들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과 오늘날 보수가 이들로부터 정통성을 찾고 있다는 사실이 비극이다.
1945년 8월은 현대 한국이 기원하는 결정적인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직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해방 직후부터 1945년 말까지 벌어진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상황을 다루는 책.
조선건국동맹
일본의 패망을 예견한 여운형은 1944년 조선건국동맹을 발족했다. 1940년대 초부터 국내외에 '건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조직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일본의 패전이라는 정세 인식을 전제로 한 것이다. 건국동맹은 일제 말기 거의 유일한 전국적 규모의 비밀조직이었고, 해외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대에도 중점을 두었다.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 수뇌부는 8월 10일 단파 라디오를 통해 일본이 국체호지(천황제 유지)를 조건을 포츠담 선언을 수락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들은 종전 직후 청진에 상륙한 소련군이 기차로 남하해 적색정권을 수립할 것이고, 이 과정에서 일본인에 대한 대규모 폭력 사태가 일어날 것을 우려했다. 그 대책으로 경무국장 니시히로는 종전 후 치안유지를 한국인에게 맡기기로 한다. 총독부는 우선 송진우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교섭을 거절당했다. 안재홍은 후보로 두기는 했지만 직접 접촉하지 않았다. 여운형은 조건을 내걸어 수락을 받은 뒤 치안유지를 담당하기로 한다.
총독부와의 교섭 중 여운형은 송진우에게 협력을 제안한다. 여운형은 일제가 이미 포츠담 선언에 의해 무조건 항복이 결정되었으므로, 조선 인민을 중심으로 주권 확립에 매진하고 국내외 혁명단체를 총망라한 독립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송진우는 총독부가 정권을 인도하기 전까지는 독립정권을 세울 수 없고, 향후 임시정부만을 정통으로 환영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충돌했다.
이 교섭 과정에 대해서는 건국동맹과 총독부, 한민당의 주장이 엇갈린다. 여운형을 비롯한 건국동맹 측은 여운형이 정치범과 경제범의 즉시 석방, 식량 확보, 총독부의 간섭 금지 등 조건을 걸어 교섭을 주도했다고 주장했다. 총독부 측은 정치범과 사상범의 석방이 여운형의 요구가 아닌 총독부의 대첵이었다고 주장했다. 한민당 측은 송진우가 정권 인수를 제안 받았으나 거절했다고 주장하며 여운형이 친일 협력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여운형은 총독부에 치안유지협력회 수준의 협조를 약속했지만, 막상 해방 직후에는 여운형이 구상해온 건국 준비 활동에 돌입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8월 15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12시에 천황의 옥음 방송이 있었지만, 잡음이 심하고 히로히토가 궁중에서 쓰는 용어로 연설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일본이 패전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일본의 패전이 조선의 해방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일본인은 물론, 한국인들도 일본이 패전했다는 소식에 비통해 했다.
8월 16일 여운형을 비롯한 건준 일행은 서대문형무소의 정치범 석방에 입회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2000여 명의 독립투사들이 석방되자 수많은 한국인들이 그 뒤를 따라 행진했다. 건준은 "자중과 안정을 요청한다"는 전단을 서울 시내에 살포했다. 총독부와 합의한 치안유지 협조의 뜻을 전한 것이지만, '조선건국준비위원회’라는 공식 조직이 출범했음을 알린 행보이기도 했다. 안재홍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건준의 사명과 함께 일본인의 생명 및 재산 보장을 강조했다. 방송을 들은 한국인들은 일본인의 안전 보장보다는 건준이라는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8월 17일에는 전국 각지에 태극기가 게양되었고, 군중이 경찰서를 점거해 '건준 경위대’라는 간판을 달았다. 전국 28개 형무소에서 약 2만여 명의 정치범, 사상범, 경제범이 석방되었고, 이들이 고향에 돌아가 전국적으로 자생적인 치안위원회, 자치위원회 등을 조직했다. 자생적 조직들은 곧 건준의 지방지부로 재편되었고, 8월 말에는 145개 시, 군에 건준지부가 설치되었다.
건준은 한국인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해방의 공간을 형성함으로써 일제 패망과 한국 해방의 연결을 실현했다. 건준은 총독부의 치안유지 협력에 관한 타협으로 출발했지만, 실제로는 행정권을 이양받는 모양새로, 해방정국에서 자주적 국가 건설의 중심체가 되었다.
조선인민공화국(인공)
건준은 1차 개편에서 건국동맹원을 필두로 부서를 결정했다. 이후 2차 개편에서 12부 1국제를 채택하면서 여운형계, 장안파, 재건파, 안재홍계, 한민당계를 간부에 임명하며 좌우파를 망라한 조직을 구성했다. 문제는 위원장 여운형이 백색테러를 당해 정양하고 있었기 때문에 2차 개편을 부위원장 안재홍이 주도했다는 것이다. 이때 안재홍은 한민당계에 타협적인 행보를 보였는데, 한민당계는 이를 기회 삼아 건준을 장악하고자 했다. 여운형계과 좌익계 인사들은 한민당과의 교섭을 부인하며 안재홍계와의 대립을 표면화했다.
2차 개편에서의 분열과 총독부의 공작, 한민당의 공격, 백색테러가 겹치면서 8월 31일 여운형은 사직 의사를 표명했고, 안재홍을 비롯한 간부진도 총사직했다. 3차 개편에서는 안재홍계와 한민당계를 배재하여 여운형계와 남로당, 공산당 중심의 조직을 구성했다. 여운형은 대체할 인사가 없다는 이유로 유임되었다. 3차 개편 이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인민위원회로 정권을 이양하는 것을 목격한 재건파는 낙관적인 정세관에 근거해서 서울의 좌익 인사들을 중심으로 건준을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전환했다. 중앙 건준이 인공으로 재편되자 지방에서도 건준 지부가 빠르게 인민위원회로 재편되었다.
당시 한민당은 여운형이 공산주의자이자, 친일파라는 모순된 주장을 하며 여운형을 공격했다. 종전 후 총독부는 군중 속에 앞잡이를 심어 소동을 일으키거나, 테러 및 정보 수집/교란, 분쟁 야기 등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단체를 조직했다. 여기에 투입된 자금의 출처는 조선은행을 통해 대량 발행된 화폐였으며, 이는 종전 직후 한국 경제에 회복 불가능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인공은 인민위원에 여운형계와 재건파, 한민당 간부들, 민족주의계를 임명했고, 심지어 아직 귀국하지 않은 이승만, 김구, 김일성 등 인사까지 대거 포함했다. 이는 동의를 얻지 않은 완전히 일방적인 인선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인공을 급조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측된다.
- 미군 진주에 대비할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여운형은 연합군이 진주만 하면 즉각에서 국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인공을 준비했다고 발언했다. 소련이 북한에 진주한 뒤 각종 자치위원회와 건국준비위원회를 인민위원회로 통합해서 행정권을 이양한 선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을 1번으로 인민위원에 지명한 것과 인공 조직 구성에서 이승만을 주석으로 선임한 것도 미군이 소련군처럼 인공에 행정권을 이양할 것이라는 예측에서 비롯되었다.
- 우익의 중경임시정부 절대 지지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이었을 수 있다. 건준은 해방 직후부터 중경임시정부만을 지지하는 한민당계와 대립했다. 건준 장악에 실패한 우익 인사 대부분은 중경임시정부 지지를 전면에 내세워 정당성을 확보한 뒤 한국민주당을 결성했다. 여운형을 비롯한 건준은 (1) 중경임시정부 자체의 역량이 부족하고, (2) 임시정부 외에도 국내외에 주요 독립운동 단체들이 여럿 존재하기 때문에 임시정부만을 지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인공은 재건파 조선공산당이 주도했다. 우익과 좌익 일부를 배제하며 민족통일전선이라는 정당성을 잃었고, 심지어 여운형도 지도력의 중심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다. 결국 인공은 우익과 좌익 모두에게 비판 받는 위치에 놓였는데, 장안파는 혁명성과 대중적 토대가 결여되었다며 인공을 비판했다.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미군정)
남한 점령 임무를 수행한 미24군단은 조선총독부와 조선에 주둔하던 일본17방면군에게 연락을 취해 정보를 얻었다. 17방면군은 의도적으로 소련군의 약탈행위와 남진을 강조하며 한국인 폭도 중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과장해 전달했다. 심지어 미군은 개성(Kaijo)를 경성(Keijo)로 오독해 소련군이 경성을 점령했을 가능성을 우려하고 전투 상륙을 염두에 두기 까지했다. 24군단장 존 하지(John R. Hodge) 중장은 총독부의 치안유지에 협조하라는 위협적인 전달을 살포한 뒤 제물포에 상륙했다.
하지는 정치와는 거리가 먼 장교였고, 동아시아에 대해 무지했다. 그런 무지함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남한에 상륙한 24군단은 질서유지를 위해 조선총독부를 유지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미 건준의 주도로 해방의 자유를 누리고 있던 한국인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고, 미군정에 대한 신뢰는 시작부터 무너졌다. 총독부를 대체할 한국인 인력을 찾지 못한 하지는 ‘신뢰할 수 있는’ 인사들을 고문으로 임명했다. 이들은 대부분 조선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미국인들, 미국 대학에서 유학한 한국인들이었고, 과반 이상이 기독교인이었다. 조선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미국인들은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조언을 했고, ‘좋은 교육을 받은’ 한민당계 한국인들은 반공주의에 입각한 조언을 했다. 친미-반공-기독교-엘리트 인사들은 미군정으로부터 새로운 기회와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
해군 군의관이었던 조지 윌리엄스(George Z. Williams) 소령은 인천에서 태어나 충남 공주에서 자란 미국인이었다. 한국인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하지는 즉각 윌리스를 비서 겸 정치고문으로 임명했다. 윌리엄스는 한국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 확정적 태도와 판단을 제시했다.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미국 선교사들과 연관된, 교육받고 상당한 부를 소유한 조선의 지배층에 대해서는 공감을 가진 반면, 반기독교적인 공산주의 운동과 민중운동에 대해서는 반감을 가졌다. 한국에서 윌리엄스는 통역을 맡은 일개 군의관이었지만, 개인적 경험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친미, 반공, 기독교, 보수주의, 임시정부, 자본가, 교육가 중심의 한국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뚜렷한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 윌리엄스는 약 3개월 정도 한국에서 활동하다가 미국으로 돌아갔고, 평생을 병리학자이자 의사로 살았다. 윌리엄스 개인에게 해방 직후 한국에서의 활동은 인생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한국 현대사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하지는 조선의 정세를 좌익과 우익의 대결 구도로 인식했다. 이로 인한 미군정의 첫 번째 정책적 결정은 인공을 부정하고 지방인민위원회를 해산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결정은 중경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이승만과 김구의 귀국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이 두 결정은 모두 한민당계가 주장해온 것과 일맥상통했다.
한국민주당(한민당)
한민당은 출범 당시(1945년 9월 16일) 인공 타도를 유일 목적으로 내세우고 여기에 동의하는 모든 세력을 규합한 정당이었기 때문에 구성원 사이에 다양한 사상과 배경, 지향이 병존했다. 그 결과 초기 한민당 지도부에는 독립운동가와 우익 민족주의 세력, 사회주의 세력이 뒤섞였고, 하부 조직에는 다수의 친일 부역자들이 합류했다. 이들에게 임정 봉대는 인공 타도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 진정성은 없었다. 한민당은 미군정 초기에 고문회의 창설을 건의해 핵심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가 고문회의의 추천을 통해 한국인 관료를 인선했기 때문에 고문회의는 미군정 초기 권력으로 향하는 중심 통로이기도 했다.
북한에서 대대적인 친일 부역자 청산 작업이 이뤄지자 친일 관리들이 대거 월남했다. 이에 따라 미군정이 활용할 수 있는 한국인 관료의 수는 두 배로 증가했고, 미군정은 10월부터 12월까지 두 달 만에 한국인 관리 75,000명을 임명했다. 이 과정은 고문회의의 추천과 미군정의 승인만 거쳤을 뿐 적절한 검토 절차가 없었다. 미군정이 고위 관료를 임명하는 규칙은 크게 두 가지였다: (1) 영어를 구사하고 교육수준이 높을 뿐 아니라 미국의 자유주의 이념을 옹호하는 친미 성향을 갖춘 인물일 것, (2) 공산주의와 관계된 사람은 배제할 것. 그 결과 미군정기 고위 관직에 임명된 이들은 한민당 출신, 흥사단 출신, 연희전문/숭실전문/세브란스 등 미션스쿨 출신, 기독교도, 서북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한민당은 이미 1945년 10월에 미군정 권력 중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경찰, 법원, 검찰, 인사행정을 모두 장악했다. 한민당은 미국 유학생, 미션스쿨 출신, 기독교도, 흥사단, 서북 출신 인사들을 포괄하는 정치적 우산이었다. 조금씩은 차이가 있었지만 반공, 반인공, 친미, 미군정 권력지향이라는 점에서 같은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 한민당은 대표성과 명망성이 필요했고, 서북 계열은 안창호가 사망한 뒤 지도자를 상실한 상태였다. 그리고 명망뿐인 이승만은 국내 지지기반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한민당과 서북 계열은 연로한 이승만을 내세워 쉽게 권력을 이양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
이승만은 한국에서는 거의 잊힌 인물이었다. 이승만이 한반도에서 명성을 떨친 것은 1919년 3.1 운동과 상해임시정부 시기였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외무부 산하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이라는 직함만 가졌을 뿐, 태평양전쟁기에 재정 지원없이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3.1 운동을 지지했던 재미 한인들은 노쇠했고, 2세들은 한국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이승만의 정치적 자산은 (1) 미 군부 및 공작기관과의 연계, (2) 조선에서 추방당한 선교사들과의 관계였다. 그런데 1943년 이승만이 미국의 소리(VOA)를 통해 연설한 내용이 국내 단파방송으로 알려지며 서울의 여론 주도층을 움직였다. 방송을 들은 이들은 이승만의 위상을 과대평가함으로써 여운형, 송진우 등 좌우파를 막론하고 이승만을 지지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귀국 직후 정당통일운동의 일환으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출범했다. 해방 후 난립한 정당들을 통일하고, 분열된 정계를 통일하자는 움직임이 안재홍에 의해 시작됐는데, 이승만 중심의 정당통일운동으로 전환된 것이다. 미군정은 이승만의 귀국을 기점으로 신탁통치안의 대안으로서 과도정부를 구체적으로 추진했다. 카이로 회담과 얄타 회담을 거치면서 연합국은 한국에서의 신탁 통치가 논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지는 신탁통치가 아닌 과도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시정치고문으로 부임한 윌리엄 랭던(William R. Langdon)은 하지의 과도정부 수립 구상을 정무위원회(=독촉중협)로 구체화했다. 하지는 이 계획의 중심 인물로 이승만을 추대하고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그는 10월 연합군 환영대회에서 이승만을 "자유와 해방을 위해 일생을 바쳐 해외에서 싸운 분"으로 소개했다. 하지는 이미 자신의 권한을 한참 벗어난 독단적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이승만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모스크바 회담 전에 독촙중협을 중심으로 전한국군민집행부, 통합고문회의, 정무위원회를 구성해서 신탁통치안을 무산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독촉중협은 우익 한민당만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고, 박헌영과 여운형이 탈퇴하면서 실패했다. 좌익과 중도파, 임시정부를 포함하지 못하면서 미군정이 신탁통치의 대안으로 제시한 과도정부 수립 계획도 무산되었다. 이승만은 독촉중협을 남한 자치를 목표로한 남한의 유일한 조직체로 목표했다. 국내에 임시정부가 부재한 틈을 타 이승만은 독촉중협을 중심으로 정치 블록을 형성하고 있던 것이다. 11월 귀국한 임시정부는 "26년된 임시정부"를 일개 독촉중협에 흡수시킬 수는 없다는 입장을 보이며 충돌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국민회)
신탁통치에 대한 동아일보 오보 사건 이후 국내에는 반탁 광풍이 불었다. 임시정부는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해 반탁 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반탁이라는 공통의 목적으로 이승만의 독촉중협과 통합해 독촉국민회를 출범했다. 1946년 이승만은 미군정의 후원과 한민당과 우익 청년단체의 지지를 받으며 남한을 순행했다. 대규모 병력이 동원되어 이승만을 경호했고, 우익 청년단은 순행에 발맞춰 좌익 정당과 사회단체에 폭력을 가했다. 이승만은 여세를 몰아 독촉국민회를 장악했고, 김구는 2인자로 전락했다. 하지와 미군정은 이승만에게 1000만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하면서까지 이승만을 지지했다.
1946년말이 되자 미군정의 행정권력은 한민당이, 정치권력은 이승만이 행사하고 있었다. 해방 직후 분출했던 각 정치세력의 지향과 행위 주체들의 욕망이 뒤엉켜 1946년 말의 남한을 장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