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미술과 건축, 순수 예술과 응용 예술의 차이, 참여 작가의 나이와 경력의 차이, 예술 장르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인식의 차이 등 국전에서 건축의 자리가 다른 미술 분야와 동등하다고 여기기는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전의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건축이 언제 수상했는지는 국전에서 건축이 차지하는 위상을 가늠하는 하나의 지표가 된다. 흥미롭게도 건축부가 최초로 대통령상을 받은 때는 5.16 쿠데타 이후 6개월 뒤에 개최된 1961년 10회 국전이다. 홍익대학교 학생이자 육군이병으로 복무 중이던 강석원과 설영조는 '육군 훈련소 계획’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국무위원은 물론이고 서울 시장을 비롯한 중앙 및 지방 행정 조직의 수장으로 예외 없이 군인 출신이 임명된 쿠데타 직후의 시대, 복무 중인 이병의 훈련소 계획에 수여된 대통령상은 쿠데타 세력이 건축에 접근한 태도가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다. 이수상을 계기로 강석원과 설영조는 아시아재단의 후원으로 파리로 여행을 떠나는 특전을 누린다. 이를테면 한국의 젊은 건축가들에게 국전 대통령상은 보자르 아카데미의 로마 대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선 건국 이래 중앙 권력의 상징 공간으로 일제강점기와 미군정의 유산이 여전히 강력하게 남아 있는 곳에, 육조건물이 훼철된 이후 처음으로 한국인의 손으로 민주 공화국을표방하는 독립 국가의 상징적 건물을 세우는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어긋난 시간을 표상하는 두 개의 모더니티 위에 또 다른 모더니티를 덧씌우는 작업이었다. 프로이센 건축가 게오르크 드 라란데의 원설계로 1926년 일본 건축가 노무라 이치로의 손에 의해 완공된 구조선총독부는 일제 식민지 권력의 물화 그 자체였지만 시대착오적인건물이기도 했다. 유럽에서 아방가르드가 정점이던 시절에 지어진유사 역사주의 양식은 서구와 일본의 근대성 사이에 가로놓인 시차, 서구의 근대성과 식민지 근대성의 시차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미국의 원조 자금에 전적으로 의존해 미국 PAE(Pacific Architects& Engineers)가 설계하고 빈넬의 시공으로 1961년 완공된 USOM청사와 정부청사는 전후 미국에 의해 재편된 세계 질서 속에 한국이 편입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한국이 피할 수 없었던 이 두시간성의 틈새에 정부종합청사의 대지는 위치한다.
근대화를 이행하지 못한 채 식민 지배를 겪고 식민 지배국의패배로 독립하였으나 냉전과 함께 분단되었고 곧이어 긴 전쟁을 겪은국가가 자신들의 자본과 기술, 지식으로 처음 건립하는 정부청사였다.프로젝트의 성격과 규모 때문에 한국성이나 전통을 요구받지도않았다. 즉 한국 현대 건축의 역량을 있는 그대로 가늠해 볼 수 있는 계기였다.
경험을 통한 '학습’과 실천이 논리적이고 이론적인지식의 축적을 앞서 있었다. 미적 판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공학적근거를 요구하는 것일 때 '해 봐서 안다’는 경험 우선주의의 위력은 배가되었다. 정부종합청사의 설계 번복 과정에서 총무처는 우물기초와 조립식 콘크리트 공법을 확신했지만, 건축계는 그럴 수 없었다.건축가들의 경험은 공병감의 경험 앞에서 무력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건축물은 형태와 상징 같은 미학적 측면, 프로그램과 성능 같은 건축적 대상으로 파악되고 평가되기 이전에 건설과 시공상의 특성으로 소개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이 건물은 완성된 뒤 획득하는 이미지나 의미보다 공사 현장의 이미지로 더각인되었다. 1968년 당시 공보국 사진 담당관이 포착한 '건설중’인 고층 빌딩 사진에서도 이러한 '건설’의 표상은 나타난다. "민족의 혼과 단일 국가를 상징할 수 있고 자손만대에 남겨줄 유일한 유산"으로 불리던 정부종합청사는 준공과 함께 담론의영역에서도 도시의 문맥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다. 총무처는 1970년 준공과 함께 정부종합청사 소개」라는 소책자를 펴내는데, 여기서도정부종합청사가 중앙청, 삼일로빌딩, USOM 청사 등과 비교해 가장큰 규모라는 것을 연 면적과 소요된 시멘트, 철근, 유리, 대리석, 작업인원을 통해 강조할 뿐이었다.
이는 정통성이 없는 군부 정권의 문화 프로젝트인 동시에 국민 국가 형성에 없어서는 안 되는 '신화 만들기’였다. 김수근이 조선의 석상을 보며 한국인 건축가라는 자의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한국 건축계의 신화 역시 개인의 자각인 동시에 시대의 지배적인 분위기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시간(역사)을 공간(구체적인 장소)으로 바꾸는 작업은 한국 사회가 통과해 나가야만 했던 의례였다. 이 과정은 건축의 생산과 재현을 분리하는 기제였다. 한국성의 재현을 위탁받은 몇몇 문화 시설 및 기념비 건축과, 재현과 표상의 역할이 거의 주어지지 않은 건축으로 양분되었다. 양식과 형태가 중요한 동일시를 위한 공간에서는 구법과 공법을 묻지 않았고, 효율과 생산성이 요구되는 건물에서는 재현의 논리가 설 자리가 없다시피했다. 20세기 중후반 한국의 '현대 건축’은 역사를 환기하는 데에는 문화재나 유적을 이기지 못했고, 당대의 성취와 정체성을 표상하는 데에는 인프라스트럭처나 공장 구조물에 미치지 못했다.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건축은 미의 차원에서는 역사에 졌고, 숭고의 차원에서는 건설에 졌다.
조사는 객관적이고 현실적이었던 데 반해, 이를 바탕으로 한 계획은 이상적이었다. 20년을 사업 기간으로 삼고 기본 계획을 따라 단계별로 진행한다고 해도 1967년 한국에서 20만 제곱미터가 넘는 대지를 단일한 건축 프로젝트로 다루는 일 자체가 계획의 유토피아였다. 같은 해 7월 26일 준공한 세운상가의 비어 있던 대지 조건, 투여할 수 있는 권력과 자본의 양 등의 측면에서 실현 가능한 최대 면적이라고 여겨도 좋은 - 대지 면적이 3만 5000제곱미터였던 것을 감안하면 재개발계획이 갖는 위상과 공상적 성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실현 자체의 가능성보다 이데올로기적 의미가 더 컸다. 시각적 측면에서도 기술개발공사의 건설 예상도는 세운상가와 여의도 종합개발계획과 동일한 선상에 있었다. “미래를 기획하고 현재의 기대에 따라 미래를 계획" 하는 개입자로서 국가의 역할은 어느 때보다 강렬히 나타났다.
몇몇 산발적 예외를 제외하면 '포스트’는 1987년 이후의 담론이다. 포스트 담론은 포스트(post)라는 접두사의 뜻대로 사후적 인식론의 형태를 띤다.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이 예전과 다르다는 인식은 근대적 역사의식의 근본 테제이기도 했다. 리오타르 등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 이론가들이 모더니티 속에 이미 포스트모더니티가 내재되어 있다고 언급한 이유다. 그러나 1980~90년대 한국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급변하는 국내외의 정치지형과 맞물려 직선적인 시간성(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선후 관계)과 역사의 단절이라는 개념과 떼어서 생각되기 힘들었다. 시대가 급변하고 있다는 인식 아래에서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찬성하는 반대하는 여러 사람들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나름대로 당대를 진단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자기에게 잘 맞는 옷인지 살피면서 자신을 더 분명히 알게 되는 장치 구실을 한 것이었다.
많은 건축가들도 다양한 의견을 쏟아 냈다. 상충하는 견해 속에서도 전반적인 기조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피로감이었다. 우리에게는 모더니즘도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라고 바라보는 입장이 다수였다. 훗날 서울시청을 설계한 유걸은 "말초적이고 당치도 않아 보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지적이고 질서 있는 모더니즘을 배경으로 할 때에만 공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극복하고자 했던 차가웁고 합리적이며 절제적인 '현대’라는 것 없이는, 이 반(反)현대는 공허한 미친 짓이 되는 것이다"라고 가차 없이 평가했다.
1980년대 내내 끓어오른 사회 운동의 에너지가 건축 분야를 달구기 위해서는 다른 분야보다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건축에서 그 열기는 문학과 예술의 리얼리즘 논쟁, 사회구성체 논쟁, 노동 현장 쟁의 등에 견줄 만큼 뜨겁지 않았고 인화성도 높지 않았다. 1960년대 이후 20년동안 한국에서는 콘크리트(현장)가 종이(역사와 이론)를 압도했고, 유례없는 호황 덕에 이어진 당장 급한 공사는 충분한 논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건축 설계 시장 자체가 운동의 타도 대상이었던 국가 체제와 긴밀하게 엮여 있었다. 이런 사정으로 건축에서 운동은 주로 각 분야의 민주화 운동이 봇물처럼 터져나온 1987년 이후에 활발히 일어났으며, 학생들과 사회 초년생들이 주도했고, 국가가 주도한 여러 대형 사업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다. 1987년 창립된 청건협은 여러 건축 운동 흐름을 이끈 대표적인 단체다. 청건협은 여러 필지를 폭력적으로 병합해서 이루어지는 도심 재개발 사업에 반대하며 도심지 소필지 재개발 현상 설계를 기획했다. 청건협의 활동에 고무된 서울과 수도권 일대의 건축학과 학생 대표들이 1988년 결성한 수도권지역건축학도협의회(이하 수건협)는 사당동과 봉천동 일대의 철거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건축이라는 육중한 매체를 통해 구체적인 현장에 개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들을 제도판에서 현실로 옮겨 갈 도구가 이들에게는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현실화를 목표로 하는 것도 아니었다. 대학생, 대학원생, 설계 사무소나 건설 회사의 신입사원들이었던 이들의 활동은 실제 건물을 짓는 것 이상으로 기존 권력 체제와 다른 실천의 가능성을 묻는 것, 그리고 이 가능성이 어떤 이론적 토대 위에 서 있어야 하는지를 점검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활동현장은 공사판이 아니라 종이 위였다.
이 문서를 인용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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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현,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발전국가 시기 한국 현대 건축”, 워크룸프레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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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무엇을 했는가』와 맞닿는 지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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