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법률가들』

헤린더 파우어-스투더, “히틀러의 법률가들”, 박경선 역, 진실의 힘, 2024.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법학자들은 제3제국[1]의 사법제도를 '악법’으로 치부하는 것에 그쳤다. 하지만 당대 가장 선진적인 헌법을 가졌던 바이마르 공화국[2]이 권위주의적 정치 이데올로기에 어떻게 무너졌는지, 체제에 충성하는 법이론가들이 왜곡된 규범질서를 정당화함으로써 법이 어떻게 나치에 편승했는지, 국가 권력이 어떻게 일반적인 도덕률을 합법적으로 위반할 수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자는 일반적으로 '국가사회주의’로 번역하는 'Nationalsozialismus’를 '민족사회주의’로 번역했다.

1919년 8월 공포된 바이마르 헌법 1조는 "독일국은 공화국이다. 국가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였고, 제2장에서는 독일 국민의 기본권을 인정했다. 바이마르 헌법은 당대에서 가장 선진화된 헌법이었지만, 폭넓은 지지는 받지 못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패전으로부터 수립된 국가였고, 수립 직후부터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제정 시절 정치 참여를 제한받아왔던 의원들도 건설적인 의회정치 문화에 대한 경험과 책임감이 없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빈약한 토대와 더불어, 헌법의 제48조도 공화국의 몰락에 기여했다. 독재조항이라고 불리는 제48조는 제국 대통령이 긴급명령을 통해 기본권을 제한하고, 지방에 군대를 동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헌법 제48조 (위헌, 공안침해의 방지를 위한 조치)

  1. 각 주중에 국가의 헌법 또는 법률에 의하여 부여된 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국가대통령은 병력을 사용하여 그 의무를 이행시킬 수 있다.
  2. 국가내에 있어서 공안의 안녕질서에 중대한 장해가 발생하거나 또는 발생할 우려가 있을 때에는 국가대통령은 공공의 안녕질서를 회복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하고 필요 있을 때에는 병력을 사용할 수 있다. 이 목적을 위하여 대통령은 일시적으로 제114조 제115조 제117조 제118조 제123조 제124조 및 제153조에 정한 기본권의 전부 또는 일부를 정지할 수 있다.
  3. 본조 제1항 또는 제2항에 의하여 실행한 모든 조치에 대하여 국가대통령은 지체없이 이를 국가의회에 보고하여야 한다. 국가의회의 청구가 있을 때에는 그 조치는 효력을 잃는다.
  4. 급박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 있어서는 각 주 정부는 그 영역내에 있어서 임시로 제2항에 정한 조치를 할 수 있다. 이 조치는 국가대통령 또는 국가의회의 청구가 있을 때에는 그 효력을 잃는다.
  5. 상세한 것은 국가법률로 정한다.

헌법 초안 작성자들은 극우파와 극좌파의 영향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제48조를 도입했다. 그런데 초대 대통령 에베르트는 취임 후 3개월간 공산주의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해 일곱 차례나 긴급명령을 사용했다. 1932년 7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임명한 파펜 총리는 프로이센 주가 여러 도시에서 발생한 나치 돌격대의 유혈 사태를 제대로 진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긴급명령을 발동해 프로이센 주 정부 내각을 해체하고 연방에 복속시켰다. 대통령은 국민에 의해 선출되었다는 이유로 긴급명령의 발동에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국사재판소가 긴급명령에 위헌적인 요소가 있다는 의견을 냈지만, 법원의 의견에는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었다. 헌법재판소가 없었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대통령이 곧 헌법의 수호자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마지막 몇 달간 보수주의자들은 히틀러가 볼셰비즘을 막아주는 방패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히틀러가 집권해도 충분히 히틀러와 나치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제48조는 나치가 헌법적 규범 안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획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말았다.

훗날 나치에 부역한 법학자들은 공통적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를 경멸했다. 이들은 정당 정치를 권력 다툼으로 폄하하고, 민주정의 권위가 부재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보기에 의회와 같은 제도는 시민권을 강화해 왕권에 균형을 맞추던 군주제의 틀 안에서나 통하는 것이고, 개개인의 자유주의적 기본권도 통치자와 시민이 반목하는 정치체제에나 걸맞았다. 통치자와 인민 사이의 정치적 대립을 초월해 전체국가의 통합을 상상하는 이들에게 의회나 개인의 권리는 그저 공허한 형식주의에 지나지 않았다.

1933년 3월, 대통령 힌덴부르크와 총리 히틀러가 서명한 ‘민족과 제국의 비상사태 해결을 위한 법’(수권법)에 포함된 기본권 제한은 제3제국이 전체주의 국가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나치에 충성하던 법률가들은 제3제국의 질서가 전체국가인지, 권위주의 국가인지 논쟁했다. 카를 슈미트는 전체국가에 대해, 국가가 사회의 전 영역을 통제함으로써 중립국가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국가적 통제로부터 벗어난 중립성이라는 자유주의 원칙도 폐기해야 했다. 슈미트는 모든 정치적 행동의 근원은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데 있다고 봤다. 도덕의 바탕은 선과 악의 구분이고, 경제의 토대는 이익과 손실의 구분이라는 것이다. 전체국가의 핵심적인 특권은 '적과 맞서 싸우기 위해 개전할 권리’였다. 이러한 전체국가 공식은 초기 나치의 법적 담론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슈미트의 라이벌이었던 법이론가 오토 쾰로이터는 제3제국을 권위주의 국가로 해석했다. 쾰로이터가 말하는 권위주의 국가란, 국민의 신뢰를 받은 강력한 국가권력이 국민의 삶을 보호하고, 민족 질서의 규범을 형성하는 국가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총통의 정치적 힘은 공동체의 이익에 봉사하므로 제3제국은 전체국가가 아닌 권위주의 국가라는 것이다. 나치 법률가들의 논쟁은 나치 지도부의 절대권력에 대한 욕망을 형이상학적 수준으로 추상화해 '법과 정의’라는 고차원적 개념에 결부함으로써 은폐했다. 개개인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전체성’을 공동체를 통합하는 세계관으로 포장해 전체주의적 통치 형태를 승인한 것이다.

바이마르 헌법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지는 않았으나, '수권법’을 통해 이미 규범적 효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나치는 "바이마르 헌법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모든 법률의 정당성은 헌법이 아닌 민족사회주의 혁명에서 나온다고 말했지만, 그럼에도 당시 나치 정권의 입법 과정은 바이마르 헌법 제76조에 근거했다. 나치의 헌법이론가들은 제3제국만을 위한 성문헌법이 없다는 사실에 문제의식을 가졌다. 쾰로이터는 나치 정권이 제정한 법률과 헌법을 동일시함으로써 이 문제를 극복하려 했다. 그에 따르면 총통국가는 성문헌법이 필요하지 않으며, 민족 지향적인 리더십에 따른 정치체제의 형성만이 필요했다.

헌법 제76조 (헌법의 개정)

  1. 헌법은 입법에 의하여 개정할 수 있다. 단 국가의회에서 헌법개정의 의결을 함에는 법률에 정한 의원정수의 3분의 2 이상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참의원에 있어서 헌법개정의 의결을 함에도 또한 투표수의 3분의 2의 다수를 요한다. 국민청원에 의하여 국민투표로써 헌법의 개정을 결정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유권자의 과반수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2. 의회가 참의원의 항의에 불구하고 헌법의 개정을 의결한 경우에 있어서 참의원이 2주간이내에 국민투표에 부할 것을 요구할 때에는 대통령은 이 법률을 공포할 수 없다.

제3제국에서 권한이 있는 법은 세 가지였다: 제국 의회에서 통과한 법, 행정부의 법, 국민이 통과시킨 법. 어떤 나치 법사상가들은 더 나아가 총통의 입법 권한에는 연설 등 정치 지도자의 일반적인 발언도 법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헬무트 니콜라이와 같은 헌신적인 나치당원도 입법은 순전히 사적인 의지 표명과 구분되는 안정적인 절체를 토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총통이 입법권을 완전히 장악한 상황에서 그런 요구는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국민투표는 정권의 립서비스에 가까웠다. 당시 국민투표는 이미 결정된 사안에 대해 표현의 자유가 박탈된 상태에서 이뤄졌다. 그럼에도 나치 법률가들은 국민투표를 옹호하며 총통은 인민 의지의 직접적인 발현이며, 심지어 총통의 의지와 인민의 의지가 동일체라고 주장했다. 나치의 법사상가들은 법적 규율의 상징성과 권위를 이용해 정치적, 법적 위반행위를 규범에 부합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또한 제3제국의 구조와 체계가 통상적인 국가 개념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전통적 정치이론에서 ‘공동의지’, ‘집단의지’, ‘인민주권’ 등 개념을 차용해 나치 국가를 정치적으로 정당화했다.

나치가 권력을 장악한 직후 법학자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자유주의적 형법을 민족사회주의 국가의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체계로 대체하고자했다. 1930년대 중반 법학자들은 의도 중심의 형법이 민족사회주의 세계관에 가장 잘 부합한다고 봤다. 행위가 아닌 범죄의 의도와 이념, 태도가 책임을 판단하는 데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의 결과는 범죄자 유형론으로 이어져 살인범, 상습범, 반역자 등 특정 유형의 범죄자들은 내면에 범죄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국가가 그런 소인을 인지해 범죄행위가 실현되지 않도록 예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귀결됐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개인의 양심에 규제를 맡겼던 윤리적 의무가 형법이 강요하는 법적 의무가 되었고, 이제는 일상의 모든 옳고 그름을 나치 이데올로기가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나치 국가에서 수정된 형법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1) '법률이 없으면 범죄도 없고 형벌도 없다’는 자유주의적 원칙을 '형벌없는 범죄는 없다’로 수정, (2) 의도 중심의 형법 개발, (3) 형법에서 유추 허용.

이 문서를 인용한 문서


  1. 제3제국은 나치 독일의 또 다른 명칭이다. 제1제국 신성로마제국과 제2제국 독일제국에 이은 세 번째 단일국가를 의미한다. ↩︎

  2. 바이마르 공화국은 1919년 2월에 수립되어 1933년까지 존속한 독일의 공화정이다. 1918년 여름이 되자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전은 확실해졌다. 같은 해 10월, 해군 지도부가 영국에 대한 무리한 공격 명령을 내리자 킬 항구의 수병들이 항명했고, 이와 함께 킬 지역의 노동자들이 봉기했다. 봉기는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며 곳곳에서 소비에트가 구성되어 기존의 지방정부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련의 저항 운동을 독일 11월 혁명이라고 하며, 빌헬름 2세가 네덜란드로 망명하면서 제정이 붕괴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