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성 신화
정치, 역사, 교육, 과학기술 등 다양한 영역에서 중립성은 훼손해서는 안 되는 가치로 여겨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중립성을 지키는 것은 필연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 불가능성을 무시하고 중립성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중립성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낸다.
언론이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전형적인 중립성 신화다. 중립성도 마찬가지다. 언론은 어떤 사실을 보도할지, 보도하지 않을지, 보도한 내용을 얼마나 강조할지 선택할 수 밖에 없다. 기자가 취재를 시작하는 순간 이미 언론의 중립성은 훼손된다. 그리고 데스크에서 기사를 편집하면서 그 중립성은 또 한번 훼손된다. 언론의 의무는 중립성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실을 입체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언론 윤리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언론의 해석이 사실에 반하거나 정의롭지 못한 경우이지, 중립적이지 않은 경우가 아니다.
역사 교육에서의 중립성도 마찬가지다. 가령 전두환에 대해 가르칠 때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를 정확히 같은 비중으로 언급하면 중립을 지키는 교육일까? 그렇다면 김일성에 대해서도 그렇게 가르칠 수 있을까? E. H. 카는 이미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오늘날의 역사가 어떤 사실을 역사로 선택할지, 선택하지 않을지 취사선택하는 과정에서 중립성을 잃을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교육에서의 중립성 신화는 언론의 중립성 신화와 맞닿는 지점이 있다.
과학기술이 중립적이라는 입장도 신화다. 현대 과학기술 연구는 펀딩에 의존할 수 밖에 없으며,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정부출연연구기관이나 대학교, 기업에 소속되어 있다. 따라서 어떤 과학기술을 연구할지 결정하는 과정 자체가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심지어 연구자가 순수한 학술적 의도로 연구에 참여했다는 사실도 그 연구 결과물이 중립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맨해튼 프로젝트가 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연구자들 중에는 가치판단에 따라 참여한 이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맨해튼 프로젝트의 결과물인 원자폭탄의 중립성을 판단할 때 연구자들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원자폭탄 연구가 추진된 배경과 그런 연구의 추진이 가능했던 이유, 그리고 실제로 원자폭탄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돌이켜 보면 과학기술이 중립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립성 신화가 가장 사악하게 작동하는 영역은 정치다. 정치에서 중립을 주장하는 경우 필연적으로 기득권을 옹호하게 된다. 정치적 사안에 대한 중립 의견은 대체로 무관심이나 양비론으로 나타나는데, 이와 같은 입장이 대중적인 여론이 되면 이미 권력을 가진 측이 유리해질 수 밖에 없다. 흔히 어떤 사안에 대해 "중립 기어를 박는다"라고 말하는 이들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중립 기어를 넣으면 차가 기울어진 쪽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