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1

「그대로 두시오. 애들은 학생이지 빨갱이가 아니오. 내가 알아서 하겠소.」 김범우는 순경들을 제지했다. 이 사건으로 김범우 선생이란 존재는 순천 벌교 바닥은 말할 것도 없고, 여수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몽둥이 휘두르며 덤비는 네 사람을 거뜬히 물리친 무용담도 무용담이었지만 학생들을 더욱 감동시킨 것은 그 네 학생을 극구 변호해서 경찰서에서 빼낸 것이었다. 그 일처리로하여 좌익학생들도 더 이상의 적대감을 가질 수가 없게 되었다. 김범우 선생은 좌익에 물든 학생들을 설득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극렬한 행동을 하다가 경찰서에 붙들려 들어간 학생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학교의 구분을 두지 않고 노력했다. 좌익조직에서 보면 그는 확실히 눈엣가시였지만 그렇다고 증오스러운 적도 아니었다.

이 대목에서 김범우가 백범 김구와 같은 방향성을 지닌 인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불필요한 말은 거의 하지 않는 무게감, 세상의 이치를 훤히 아는 것 같은 해박함, 그 누구도 무시하지 않을 것 같은 겸손함, 거의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진행해가는 꾸준한 행동성, 그러나 그분의 절대적 매력은 이런 모든 것들이 모아져 이루어진 것 같은 그 어딘지 우울한 듯하기도 하고, 쓸쓸한 듯하기도 한범접하기 어려운 사색적이고도 지성적인 분위기였다.

김범우 선생을 생각하는 정하섭의 의식 속에는 거의 자동적으로 염상진 위원장이 대칭으로 자리잡고는 했다. 염상진 위원장은 자신의 의지가 김범우 선생 쪽으로 흔들리지 못하게 하는 쐐기 역할을 해냈음을 정하섭은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그 깨달음이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움이되었고, 염상진 위원장에게는 죄의식이 되었다. 염상진 위원장이 옆을 지켜주지 않았더라도 자신의 의지는 추호도 주춤거리지 말았어야 했다. 다른 '동무들처럼 김범우 선생을 가차없이 반동으로 몰아칠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 누구 앞에서나 태연을 가장했을 뿐 속으로는 김범우 선생의 말에 대해서도 당위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정하섭은 그런 스스로가 싫었다. 그런 양면성과 이중구조를 가진 자신의 의식이 싫었다.그건 사상무장의 나약이나 혁명의지의 박약이나 실천용기의 빈약으로 찍힐 요소였다. 다른 학생들처럼 단순해지고 싶었다. 간단하고 명료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처럼 열정적이고 싶었다. 강해지고 싶었다.

「이 말은 자네가 제일 싫어하는 말일지 모르겠네만, 자넨 아마 광적인 사회주의자는 못될 거야. 자네가 부잣집 아들로서 출신성분이 부적합하다는 말이 아냐. 부디 공부에 충실하고, 하나의 행동을 선택하기 전에 열번이고 백번이고 생각이 앞서야 하네. 지금은 진정 어려운 시대야. 자네 같은 젊은 피들한테는 말이야…」

작별인사를 하러 갔을 때 김범우 선생이 자신의 마음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눈길을 보내며 한 말이었다. 정하섭은 그때 처음으로 마음이라는 것을 도둑맞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것이 얼마나 굴욕스럽게 기분 나쁜 일인가를 경험했다.

정하섭의 열망과 한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

김범우는 그 정치적 가해성은 외면하고 있었다. 그건 비탈길을 굴러내리기 시작한 수레바퀴의 불가항력적인 힘이었기 때문이다. 김범우의 관심은 그 수레바퀴 아래 멋모르고 깔려 압사해야 하는 민중들의 억울에만 쏠려 있었던 것이다. 「참말로 순사가 들었다 허먼 몽딩이 찜질 당할 소리지만 서방님 앞이니께 하는데, 사람들이 워째서 공산당 허는지 아시요? 나라에서는 농지개혁헌다고 말대포만 펑펑 쏴질렀지 차일피일 밀치기만 허지, 지주는 지주대로 고런 짓거리 허지, 가난하고 무식헌 것덜이 믿고 의지할 디 웂는 판에 빨갱이 시상 되먼 지주 다 쳐웂애고 그 전답 노놔준다는디 공산당 안할 사람 워디 있겠는가요. 못할 말로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들이 빨갱이 맹근당께요.」 문 서방의 말이 더할 수 없는 웅변으로 김범우의 가슴을 치고 있었다. 그 말은 민중으로서 위선적 정치현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고, 왜곡되어가고 있는 사회현실에 대한 정확한 증언이었고, 최소한의 생존권을 요구하고 있는 정당한 발언이었다.

「범우, 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고, 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네. 허나, 자네가 그런 제안을 했으니 내 생각을 말하려네. 이건 내 겸손이 아니라, 자네의 전공을 보더라도 자네는 나보다 사회나 역사를 보는 눈이 밝고 넓을 것이네. 그래 하는 말인데,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역사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좀더 좁혀서 애기하세. 자네나 나나 염상진 선배가 애초에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던 것은 오늘 같은 날을 위해서는 아니잖은가. 그런데 해방이 되면서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것도 변질되기 시작했네. 금년에 남북 양쪽에서 서로 다른 주의를 앞세워 서로 다른 이름의 나라를 세우면서 우리 모두는 인간적으로 민족적으로 우리 스스로를 살해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죄를 저질렀네. 그리고 나타난 현상이 뭐였나. 서로의 사상을 정치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해 인간을 폭력의 대상으로 삼는 극렬적 충돌이었네. 그런 야만적 행위가 또 어디 있겠나. 난 완전히 환멸하고 절망했네. 물론 좌익이나 염 선배의 입장에서는 자기네들이 먼저 폭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겠지. 군정이 폭력을 사용하니까 맞서는 것뿐이라고 할 거야. 그렇다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네. 범우 자네의 뜻을 이해하면서도 행동적 동의를 할 수 없는 것은, 그런 경직된 상황 속에서 자네와 같은 뜻이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고, 자칫 잘못하다간 그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실수를 범할 것이기 때문이네. 날 비겁자라고 해도 어쩔 수 없네. 난 모든 것에 선행해 인간이고 싶네. 난 그걸 지키기 위해서 사회주의를 버렸고, 총을 들이댄 염상진의 위협에도 굽히지 않았네. 자네의 뜻이 바로 순수한 인간적인 것임을 아네만 현실은 그걸 순수하게 받아들여주지 않을 것이네. 자네가 좌익학생들을 위해 분투했던 때와는 상황이 너무나 다르네. 협조를 할 수 없어 미안하네.」

손승호는 김범우가 민족, 염상진이 이념을 둔 자리에 사람을 뒀다.

2

인생이란 무엇이냐, 망망대해에 뜬 일엽편주라. 한문을 가르치던 선생의 말이 떠올랐다. 모든 인간은 역사의 중심에 있고자 한다. 그것은 곧 지배의 욕구다. 그러나 그 누구도 역사의 중심에 있을 수 없다. 역사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역사의 생리는 수은주 이하의 냉철한 비판이기 때문이다. 역사선생의 말이었다.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무산자 혁명,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그늘이나 역사의 변두리로 내몰린 사람들을 역사의 중심에 서게 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자 함이 아닌가. 봉건주의의 지배층과 제국주의의 부유층을 몰아내고, 그래서 계급없는 사회를 건설했는데도 역사는 중심에 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인가. 수은주 이하의 냉철한 비판을 생리로 가진 역사의 정체는 무엇인가. 역사는 사회주의의 어떤 점을 비판하게 될 것이며, 사회주의자들은 어떤 잘못으로 비판을 받아 역사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될 것인가. 역사선생의 말은 궤변이 아니었을까. 망망대해의 일엽편주라는 그 감상적 허무주의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그러나 역사선생의 말은 결코 소홀하게 넘길 수가 없다. 분명 사회는 혁명되어야 하고, 무산자는 그 주인이 되어야 하며, 역사는 새로 박음질되어야 한다. 그 역사가 비판의 제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가 가진 수은주 이하의 냉철성보다 더 차가운 온도의 냉철성을 유지하면 될 것이다. 역사의 비판 생리마저 얼어붙게 해버리게. 그게 바로 사회주의의 완벽성이 아닌가. 그렇다. 역사선생의 정의는 사회주의 건설 이전의 역사만을 대상으로 내려진 것이었다. 절대다수의 인간을 노예화한 봉건왕조와 절대다수의 인간을 수단화한 제국주의의 역사는 바야흐로 사회주의 새 역사의 비판 앞에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건 이미 역사적 현실로 실현되고 있지 아니하냐. 그 넓은 땅 러시아가 인민혁명을 창조했고, 그 넓은 대륙 중국이 성공적으로 인민의 깃발을 세워가고 있으며, 한반도의 반 북조선도 인민의 나라를 세우지 않았는가. 나머지 반마저 인민의 나라로 통일시키는 날도 멀지 않았다. 새 역사는 인민의 편에서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인민의 깃발을 세울 그날까지 혁명적 투쟁이 있을 뿐이다.

오늘날 역사는 사회주의가 '인간이 수은주 이하의 냉철성보다 더 차가운 온도의 냉철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점을 비판한다.

염상진은 참담한 기분으로 고개를 뒤로 꺾으며 한숨을 토해냈다. 공허한 그의 시야에 잡히는 것은 깊고깊은 어둠 저편에 박혀 반짝이고 있는 무수한 별들뿐이었다. 별, 별… 우주, 무한대… 염상진은 잠시 상념에 사로잡혔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끝도 모르고, 생김새도 모르고, 그래서 크기는 더구나 알 수 없다는 우주, 그 무한공간을 떠돌고 있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억 개의 별. 그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지구, 그리고 수많은 인간, 그리고 나. 인간은 무엇이고 나는 무엇인가. 나는 지금 왜 이러고 있는가. 순식간에 머리를 스치고 간 생각이었다. 언제나 허망의 늪을 장만해놓고 있는 그 생각은 이미 단련을 거칠 대로 거쳐 있었다. 그 생각 다음에는 언제나 ‘그러나…’ 하는 부정이 고개를 들고는 했다. 인간의 삶은 하루살이가 아니었다.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인생살이 한평생이 바로 하루살이라고 했다. 그 관념논리를 이해할 수는 있어도 용납할 수는 없었다. 그런 관념논리를 추종하며 생혈을 빨리는 노예의 삶을 평생토록 감수할 수는 없었다. 고통의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는지는 고통을 당해본 사람만이 아는 것이다. 평생을 노예로 사는 고통을 인내하느니 차라리 삶을 포기해버리는것이 나은 것이다. 삶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노예의 삶을 벗어날 수 있다면 더욱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혁명투쟁은 필연적인 것이 되었다.

「나는 이념이라는 것이 정치지향적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소. 변증법도, 유물론도, 봉건주의도,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모두 정치지향적인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기적인 지배도구일 뿐이오. 봉건왕조를 타도하고 세운 공산주의나 민주주의 사회가 도대체 절대 다수 인간의 삶을 위해 한 것이 뭐가 있소. 그것들은 새로운 구속일 뿐이고 인간의 본질적 문제는 하나도 해결한 것이 없소.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는 이십세기의 인간들이, 지배본능이 강한 인간들이 윤색해낸 정치연극의 각본일 뿐이오. 그것들은 절대적일 수가 없소. 왜냐하면 모순투성이고 부정확한 존재들인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오. 그것들은 인간이 갖고 있는 만큼의 모순과 부정확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해야 하오. 그러므로 그것들은 절대적일 수가 없고, 신봉해서는 안되는 것들이오. 그런데 그것들을 절대적 존재로 신봉하게 되면 그만큼 인간들을 불행하게 만들 것이오. 인간은 인간이 만든 기계가 아니오. 인간이 인간을 장담하는 것처럼 어리석음을 범하는 일은 없소. 나는 다만 인간이고 싶을 뿐이오. 」(…) 안창민은 손승호의 생각을 이해해주고 싶었다. 그의 말대로 인간은 인간이 만든 기계가 아니었고, 그가 파악하고자 하는 인간에 대한 인식 또한 하나의 가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손승호에게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역사현실을 외면하고 있었고, 인간의 본질적 문제가 삶 자체라는 인식을 결여하고 있었다.

3

「임만수, 똑똑히 들어! 모두 까내놓고 뒤집어 놓고 보면 그저 그 타령이라고? 네놈의 그 한마디로, 네놈이 일정시대에 얼마나 개같이 더럽게 살았는지 환히 알 수가 있다. 개 눈엔 똥밖에 안 보인다고, 나도 네놈처럼 산 줄 아느냐. 네놈이 일본 말단순사질이나 형사질을 해먹다가 해방이 되고 나서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다시 복직되어 토벌대장 노릇을 해먹으니, 나도 네놈 같은 과거를 가진 관동군 출신쯤으로 뵈는가? 정신 똑바로 차려. 난 독립군 출신은 못 되지만, 학병 출신이다. 글줄이나 쓴다는 놈들은 '영광스런 성전(聖戰)에 기쁨으로 참전하자’고 선동해대고, 너 같은 놈들은 덩달아 한 명이라도 더 전쟁터로 내몰려고 혈안이 되어 날뛰었던 바로 그 학병 출신이야. 일년 남은 공부를 작파하고 내가 왜 군대에 투신한 줄 아는가! 바로 네 놈들 같은 썩어빠진 종자들이 이 나라의 권력조직 속에 득실거리기 때문이었다. 위로는 친일 지주계급들이 뭉쳐지고, 아래로는 네놈 같은 민족반역자들이 모여 권력조직 칠팔 할을 장악했으니 이 나라 장래를 좌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해야 할 임무를 띤 토벌대가 여관잠을 자고 여관밥을 먹어? 그러면서도 그것이 잘못인 줄도 모르고 입을 놀려대? 너 같은 놈들은 해방이 되자마자 한 놈도 남김없이 감옥에 처넣었어야 돼. 그리고, 엄정한 재판을 거쳐 형량을 정하고, 그 기간을 강제노동으로 채우게 했어야 돼. 그것만이 네놈들의 반역으로 더욱 피해진 조국 건설에 다소나마 봉사하게 하고, 민족 앞에 최소한의 사죄를 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네놈들은 그런 속죄의 기간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네놈들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지 못했고, 더구나 다시 권력조직에 포함되고 말았으니 모두가 네놈처럼 안하무인의 짓을 하는 것이야. 여관잠을 자고 여관밥을 먹다니, 네놈은 그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영창감이야!」

두 눈에 힘을 모아 임만수를 응시하고 있는 심재모는 언성을 높이는 법 없이 차분하게 말해나갔다. 한마디 한마디를 꼭꼭 깨무는 듯한 어조에는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임만수는 물론이고 좌중의 모두는 하나같이 눈길을 떨구고 있었다. 심재모의 말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네놈들이라는 복수지칭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국군과 경찰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목. 물론 국군에도 일본군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대학을 다니고 학병으로 복무하며 국내 지식인에게 실망한 심재모 개인의 배경을 감안해야 한다. 영화 '워 머신’의 글렌 맥마흔 대장이 연상됐다.

있는 집 자식으로 아무런 고생을 모르고 자라 영문학을 전공했고, 지주의 기득권을 천부적 절대권인 것처럼 믿어 그 부(富)가 형성된 과정의 모순에 대해서는 한번도 의문을 제기하거나 회의해본 적이 없는 사나이. 그러므로 시대의 흐름이나 사회의식의 변화를 이해하거나 수용하지 못한 채 스스로의 우리에 갇혀 불행을 키워가는 연약한 사나이. 가문의 재산이나마 보호되어 있으면 모르되 빈손에 혈혈단신이 되어버린 처지에 세파를 헤쳐나가기에는 부적격한 사나이. 김범우가 긴 복도를 걸어나오며 정리하고 있는 선우진이었다.

4

혁명전사는 인민해방에 복무해야 하고, 인민은 혁명투쟁에 복무해야 한다. 백번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인민의 복무라는 것이 투쟁자가 미리 피한 위험의 희생물이 되는 것까지를 말하는 것인가. 결코 그것은 아니다. 투쟁자의 복무의 마지막은 자아희생으로 완결되는 것이지만 인민의 복무는 선의의 협조로써 끝나는 것이다. 그것은 자각과 비자각의 차이이며, 능동과 수동의 차이인 것이다. 혁명을 자각한 자는 스스로에게 의무를 지운 것이며, 그 의무의 짐은 혁명을 성취했을 때 권리의 힘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인민은 자각의 의무를 스스로 지우지 않았으므로 혁명이 성취되어도 인민일 뿐이다. 인민은 혁명의 목적이며 바탕이 되 수단일 수는 없다. 인민은 흐르는 물줄기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만 흐르고, 낮은 데를 만나면 스스로 그 높이를 높여 흐르고, 장애를 만나면 피해서 흐른다. 인민을 혁명의 수단으로 삼을 때 인민은 그 장애를 피하게 된다. 인민이 외면한 혁명은 존재할 수 없다. 혁명은 목적과 바탕을 상실했고, 인민은 다른 길을 선택했으므로, 인민은 혁명적 존재가 아니라 생활적 존재다. 그러므로 인민의 복무는 생활을 침해받지 않는다는 보장 아래서만 가능할 뿐이다. 이러한 인민의 수동성을 기회주의나 이기주의로 파악하는 혁명자가 있다면 그는 이미 혁명자가 아니다. 그래서 혁명은 외로움이 고통이라고 했다. 소화가 당한 고통은 인민의 복무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이 저지른 잘못 때문이었다. 자신의 죄가 아니었으려면 소화가 자각된 혁명의 분자였어야 했다.

염상진은 역시 냉정한 판단력과 남다른 자제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소화와 자신과의 관계를 심상치 않게 판단내리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그 말은 입에 올리지 않고 ‘당원’ 이라는 한마디로 정신을 환기시켰던 것이다. 그의 앞에 서면 자신의 몸이 투명한 유리로 변해버리는 것 같은 느낌에서 언제나 벗어나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우익은 더 말할것 없었고, 그렇다고 좌익의 편에 설 수도 없었다. 좌익은 역시 역사의 필연성에 있어서나, 민중의 생존성을 창출함에 있어서나 신뢰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상대가 버티고 있는 한 좌익이 지향하는 바는 그 실현성이 희박할 뿐이었다. 좌익이 미군정에 정면대결을 하면 할수록 그들의 목적 실현은 그만큼 강한 힘으로 저지당하고, 그에 따라 민족의 분열은 심화될 뿐이었다. 첫째 민족의 삶, 둘째 이데올로기의 실현을 생각하고 있는 그의 입장에서 이데올로기의 실천만을 목표로 성급하게 내닫고 있는 좌익의 방법론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미국이나 소련의 점령 목적이 자기네들에게 유리한 정권을 세우려는 것임이 유리그릇 들여다보듯 자명한 이상 이남이나 이북 그 어디에서든 그들의 뜻과 상반되는 이데올로기를 실천하려고 나서는 것처럼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은 없었던 것이다. 민족의 삶을 위해서는 그들의 점령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고, 이데올로기의 실현은 그 다음 단계로 추진해도 늦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정치세력들이 연합하거나, 그것이 가능하지 않으면 어느 기간 동안 정치색을 은폐하거나 해야 했다.

「자넨 나보다 생각이 더 구체적이고 앞서 있었군 그래. 자네가 왜 백범을 마음에 두는지 좀더 확실하게 알 것 같군.」

손승호가 술기운 도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백범을 전적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네. 자기가 곧 임정이고, 임정이 곧 국가라는 비민주적이고 우익적이던 초기의 사고방식 같은 건 용납할 수가 없네. 다만, 민족자주통일을 위해 공산당을 배제해서는 안된다고 한 정치태도와, 그런 맥락에서 단정수립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시도한 대목을 좋아하는 거네. 시기적으로 늦고, 여러 상황이 복잡해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나마 그런 노력을 한 것은 남북의 현실정치세력들 중에서 백범이 유일한 분 아닌가. 백범의 그 노력만큼은 성패와 상관없이 분단이 굳어져갈수록 높이 평가될 게 틀림없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김범우는 손승호에게 잔을 내밀며 물었다.

김범우가 좌익이 되지 않은 이유. 백범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이유도 납득이 된다.

김범우는 아까 염상진과 함께 걸었던 길을 혼자 걸었다. 쉽지 않은 일을 성사시켰다는 성취감보다는 염상진에 대한 신뢰감이 더 크게 앞서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렇듯 쉽사리 매듭지어지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를 만나던 순간의 반가움이 이제 허전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만났다 헤어지는 것이 어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허전함을 불러왔다. 멀지 않아 서울로 떠나게 될 거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면서도 입밖에 내지 못한 것은 그 허전함이 더 커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머잖아 우리조선공산당 화폐를 반도땅 전체가 쓰게 될 거네.」 그의 이런 견고함이 이념을 실천할 수 있는 현실적인 힘을 근거로 한 자신감의 표현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상황의 불리를 개인적 신념으로 극복하려는 자기최면적 과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또한 김범우를 허전하게 만들었다. 나날이 변해가는 현실적 상황은 염상진에게 유리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정부의 입장에 서 있는 신문의 보도나 바람처럼 떠도는 소문을 디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제주도의 항쟁도 갈수록 궁지에 몰리는 것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당 수뇌부 조직은 이미 섬을 탈출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쪽의 실정은 염상진이 누구보다 면밀하게 파악하고 있을 터였다. 상황의 불리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며칠 전 삼월 팔일을 기하여 정부는 전국적으로 학도호국단을 결성시켰다. 그것은, 군대의 계속적인 강화와 함께 또 하나의 커다란 상황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학도호국단의 결성은 반공교육을 넘어서 학생들을 군대조직화시키는 제도였다. 염상진이 그런 상황변화를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혁명은 신념과 용기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혁명이 투쟁이라면 신념이나 용기는 상대가치이지 절대가치는 아니다. 투쟁은 상대적 싸움이다. 서로의 힘겨룸이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정신적 힘을 바탕으로 거기에 물리적 힘이 가세되어야 한다.

5

현시점에서 분단상황을 완화시키는 것은 사상대립을 완화시키는 일이고, 사상대립을 완화시키는 것은 농지개혁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일이고, 농지개혁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것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방법을 택하는 일이고,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법을 채택하는 것은 지주계층의 와해와 함께 사회경제의 새 구조를 탄생시키는 일이고, 사회경제의 새 구조가 탄생되는 것은 민권회복과 인권회복을 동시에 이룩하는 일이고, 민권회복과 인권회복을 이룩하는 것은 절대다수의 의사로 좌우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탄생시키는 일이고, 진정한 민주주의가 탄생되는 것은 민족통일에 이르는 첩경이라고 서민영 선생은 말했다.

우리 사회의 이 대립적 갈등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란, 내가 보기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 따른 농지개혁단행밖에는 없네. 보게, 지금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농토문제만 해결된다면 그 어떤 주의든 지지하고 따르게 되어 있는 상황이네. 이건 바로갑오란 때와 똑같은 상황이란 말일세.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동학이라는 종교사상이 갑오란을 일으켰느냐, 농민들이 그 종교사상을 행동의계기로 삼았느냐가 문제인 것이네. 다시 말해, 어떤 사상이 다수의 사람을 의식화로 무장을 시키는 것이냐, 아니면, 다수의 사람이 공동으로처한 생활의 악조건을 타개하기 위해 어떤 사상을 필요로 하느냐 하는점일세.

그의 의식 속에서는 수없이 많은 말들이 분열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은 이학송이 한 말들의 의미가 그의 의식의 단층들에 부딪치며 의미 확산이 되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끝장난나라지… 그래, 그건 정답일지도 모른다, 아니, 정답일 것이다. 아니, 아니, 정답이다, 정답. 한 번 배신한 자 두 번 배신하고, 한 번 거짓말 한 자 두 번 거짓말하는 법이다. 그건 습관성이 아니라 자기방어와 자기합리화를 위한 필수행위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 마땅히 죽여야 한다, '옳소!'다. 그런데 그런 자들을 다 살려놨다. 그러므로 직무를 유기한 바보들은 그자들에게 되잡혀 먹히게 된다, 옳소!다. 불란서 국민들이 우리 같은 상황이었으면… 마나 가차없이 비질을 해버렸겠지. 그들은 이미 해보였어, 이차대전이 끝나고 그들도 우리와 비슷한 상황 아니었나. 나치 협조자, 레지스탕스 밀고자부터 처단하지 않았나. 그들은 우리와 달라, 인종에 우열이 있는 게 아니라 역사가 달라, 그들은 인간의 삶이 바로 역사고, 역사는 인간의 힘으로 뒤바뀌고 창조된다는 것을 알고 믿어, 그런 체험을 했으니까, 혁명을 일으켰고, 성공시켰거든. 우린 그런 역사적 경험이 없어, 그러니 역사에 대한 존엄도, 신뢰도, 책임도, 냉엄도, 두려움도, 아무것도 없어. 그래서 역사적 행위를 한 이학송은 영원히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악인이 된 거지. 해방과 동시에 친일반역자들을 민중의 힘으로 말살하지 못한 건 우리 역사가 우리에게 지운 짐이고, 풀기를 요구하는 숙제라고? 옳은 말이고, 무서운 말이야.

6

그때까지 전짓불빛은 문기수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열 명이 뒤돌려 한 줄로 세워졌다. 그들의 윗몸을 여러 개의 전짓불빛들이 일제히 비추었다.

「발사!」

총소리가 서로 뒤엉키며 어둠을 깨고 찢었고, 손들을 뒤로 묶인 사람들은 순식간에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에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에 드러났다.

「발사!」

열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에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에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에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에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여섯 명의 윗몸이 불빛에 드러났다.

「발사!」

여섯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완료했습니다.」

「수고들 했소. 갑시다.」

그러고보면 이번 전쟁은 겹겹의 싸움이었다. 겉거죽은 이땅을 반 동강낸 미국과 소련의 응등거림이었고, 속거죽은 그 두나라가 내세우는 주의에 따라 무장한 군대의 맞부딪침이었고, 그 속살은 착취한 지주와 착취당한 소작인들의 맞대거리였다. 이번 전쟁은 양쪽 군대만의 싸움이 아니라 지방마다 소작인들이 들고일어나는, 겉과속이 한꺼번에 뒤집어지고 엎어지게 되어 있는 싸움판이었다. 그런 전쟁의 승패가 어떻게 갈라질지는 너무나 뻔한 것이었다. 미국이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은 풍비박산이 날 판이었다.

한국전쟁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다. 첫 번째는 6월 25일 새벽 인민군이 38도선을 넘기 전까지는 한반도가 평화로웠다는 착각이다. 이미 곳곳에서 빨치산과의 국지전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여순사건을 겪은 소작인들이 인민군의 전면적인 진입을 갈등 해소의 계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두 번째는 인민군이 모든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남진했다는 착각이다. 전쟁 초기 인민군은 큰 전투없이 전선을 밀고 내려왔다. 이남에서도 노동자나 농민들은 인민군을 적대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심지어 그들에게 호의적이고, 피난도 가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인민군이 민간인들에게 친절하게 행동한 것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성공 사례를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일반 백성들이 왜군을 환영했다는 사실이 다시 떠올랐다.) 당시 이남이 자본가와 지주의 땅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대중의 그런 태도가 공산당에 경도되어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해방전쟁이라는 주장이 어떤 맥락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이해가 된다. 후손의 입장에서 북한의 남침은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며 평화를 깬 전쟁의 시작이었고, 미국의 참전은 '우리’를 돕기 위해 헌신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납작한 인식이다. 현재에서 역사를 평가하는 관점과 당대에서 그 일을 겪는 관점은 이렇게나 다르다.

7

「(…) 계급은 사회의 수평적 인식이고 민족은 수직적 인식인데, 그건 베짜기의 날줄과 씨줄 같은 것이오. 어느 하나가 없어서는 베가 짜질 리가 없지 않소. 그런데 조선공산당은… 어찌되었소. 민족반역세력에게 ‘민족’ 을 도용당하다니… 그자들이 어찌감히 ‘민족진영’ 이란 말을 쓸 수 있느냔 말이오. 그건… 그자들이 뻔뻔스럽고 교활한 데도 원인이 있지만, 그보다는 먼저 조선공산당이 민족을 등한히한 데 문제가 있을 것이오. 공산당 쪽에서 계급과 함께 민족을 내세웠다면 그자들이 어찌 민족을 도용할 수 있었겠소. 고유한 문화전통과 생활풍습을 가진 사회집단일수록… 계급보다는 민족에 더 호응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결과요. 그 연장선상에서 찬탁이 나왔고, 찬탁 때문에 '조국을 쏘련에 팔아넘기려 한다’는 결정적 모함을 당했고, 그러고도 그 모함을 깨끗이 척결할 만한 시원한 대안을 인민 앞에 제시하지 못했소. 그리고 더 중요한 문제는… 공산주의 이념 아래 세계 인민의 해방을 주창해온 쏘련이 조선문제를 놓고 제국주의자 미국과 한탁상에 앉아 신탁통치안을 만들었다는 사실이오. 그건 쏘련이 저지른… 분명한 오류며 모순이고, 조선공산당은 조선민족의 이름으로써 그 모순을 지적하고… 그 오류를 시정하게 했어야 하는 거요. 그런데… 찬탁을 했소. 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의 차이가 여기에 있소. 인간이 지역적으로 집단을 이루며 종족이 다르게, 말도 다르게 살아온 역사가 수만년을 헤아리는 이상 계급혁명의 통일로만 살아질 수 없다는 그 근원적인 문제를 제대로 파악해야 하는 것이오. 그 파악 위에서 중국공산당은 붉은 깃발을 내리고 국민당과 연합해서 일본도 물리치고 혁명도 성취시켰는데…」

김범준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염상진은 충격에 부딪쳤다. 충격을 받기는 안창민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당혹스런 얼굴로 서로를 잠시 맞쳐다보았다. 김범준이 생략해버린 말이 그들의 의식 속에서는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그의 말은 자신들이 여지껏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였고, 비판이었다. 그의 안목이 크고 예리함에도 놀랐지만, 그런 위험천만한 비판을 가하는 데 더욱 놀란 염상진과 안창민은 할 말을 잊고 있었다.

8

민기홍은 쌀보다는 잡곡이 더 많은 밥을 아무 맛도 모르고 씹고 있었다. 그는 이미 어느 한쪽 편에 가담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처자식을 굶겨죽이지 않기 위해서건 어쨌건 간에 자신은 전시상황의 신문사에서 펜대를 놀리기 시작하면서 일방적으로 한쪽 편만을 들게 되었다. 전쟁은 정치의 적극적 수단이면서, 정치의 목적인 인간의 인간적삶 자체를 파괴하는 괴물이었다. 전쟁의 기본은 적과 우방을 간단하고명확하게 가르는 것이었다. 그 양분법 앞에서는 그 이외의 어떤 것도용납되지 않았다. 중도적 입장은 기회주의일 뿐이었고, 객관적 입장은방관주의일 뿐이었고, 종교적 사고는 허무주의일 뿐이었고, 개인적 판단은 이기주의일 뿐이었다. 전쟁이 정치를 넘어서 역사라는 명분과 맥을 대고 있을 때 그런 결론은 더욱 선명해졌다.

군인들은 개머리판으로 사람들을 떠밀어 길 옆으로 몰아붙였다. 길을 벗어난 사람들 앞에는 탄량골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탄량골로 밀어붙여졌다. 땅거미가 더 짙어진 속에 낮에와는 다른 찬바람이 끼쳐오고 있었다. 가녀린 흐느낌 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했다. 사람들은 골짜기에 앉혀졌다.

「군경 가족과 방위대 가족이 있으면 나오시오!」

지서주임이 소리쳤다. 열댓 사람이 다투어 뛰어나갔다. 뒤를 이어 군인들이 사람들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골짜기에 삥 둘러섰다. 그때 어느 남자가 팔을 치켜들며 벌떡 일어났다.

「대장님, 죽어도 말 한마디 하고 죽읍시다. 국민 없는 나라가 무슨 필요가 있소.」

따앙!

총소리가 울리고, 그 남자가 푹 고꾸라졌다. 그 총소리가 골짜기에 겹겹이 울리며 긴 꼬리를 끌었다.

9

하대치는 문제의 심각성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었다. 먼저, 이북 출신과 이남 출신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의 문제였다. 그 문제는 인공이 시작되면서부터 드러났고, 당에서는 그 바람직하지 못한 문제를 근절시키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당의 선전에 의한 인민군의 또 다른 이름은 해방군이었고, 전시하의 당과 행정조직을 원활하게 운용하기 위해서 많은 요원들이 북쪽에서 파견되었다. 사실 남쪽에서는 오랜 지하투쟁을 하는 동안에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어버려 행정을 중심으로 한 모든 분야를 장악해야 하는 당조직을 구축하는 데도 일꾼들이 모자라는 실정이었다. 그러니 이승만정권의 반동공무원들을 그대로 쓸 수 없는 행정조직의 공백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런 필요에 따라서 북쪽에서 파견된 요원들은 자연스럽게 당과 행정조직의 중간간부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파견은 물론 해방이 완료되고 남쪽 요원들이 확충될 때까지라는 시한부였다. 대학생들이 한두 달 시한부로 남쪽 전역에 교양지도원으로 파견된 것도 같은 계획의 하나였다. 면단위 이하까지 인민을 상대로 사상을 조직하고, 당사업을 제대로 선전선동할 수 있는 일꾼들이 부족한 실정이라서 대학생들까지 동원된 것이었다. 형편이 그렇게 되고보니 거의 모든 좋은 자리는 이북 사람들이 차지한 형국이 되었고, 그런 분위기는 이남 사람들에게 상대적 소외감이나 반발을 느끼게 할 수 있는데다가, 북쪽에서 파견된 요원들은 일관된 당의 지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사람이란 각양각색이어서 더러 당의 지시에 어긋나게 '남조선을 해방시켜주었다’는 우월감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 그 우월감은 상대적으로 열등감을 구체화시켰고, 그 열등감은 반발로, 적대감으로 발전하는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런데 전세가 역전되면서 당이나 행정직 요원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대학생들도 북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입산하게 되었다. 입산을 하면서 그런 갈등은 현저하게 줄어들었지만 그러나 말끔하게 가신 것은 아니었다. 남과 북의 사람들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입장이 달라진 데서 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당에서는 학습을 통해서 그런 감정의 일소를 강조하고 있었지만 실생활의 국면국면에서는 미묘한 감정들이 순간적으로 부딪치고는 했다. 극한적인 입산투쟁이 전개되면서 이남 출신들은 대부분의 이북 출신들을 겁쟁이로 비웃고 있었고, 이북 출신들은 또한 이남의 농민이나 기본출들의 사상적 무지에 대해서 경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간격은 당이론이나 학습이 좁힐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0

「하나아!」 바람에 눈가루가 휘날렸다.

「두울!」 소나뭇잎들 위에 핀 눈꽃들이 바람에 뚝뚝 떨어져내렸다.

「세엣!」 희게 말라버린 갈대꽃들이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네엣!」 까마귀 네댓 마리가 까옥까옥 울어대며 날아갔다.

「다서엇!」 어느 군인의 코 들이마시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퍼졌다.

「여서엇!」 가시덩굴 사이에 낀 삐라 한 장이 바람에 떨고 있었다.

「일고옵!」 소위의 목소리가 한층 커졌다.

「여더얼!」 소위가 중사를 쳐다보았다. 중사의 두 손이 배낭의 멜빵에 매달린 두개의 수류탄으로 옮겨졌다.

「아호옵!」 소위의 외침이 더 커졌다. 중사의 두 손에 수류탄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열!」 굴 속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중사가 수류탄 하나를 깠다. 그리고 또 하나를 깠다. 소위가 뒤로 물러났다. 중사가 수류탄 두 개를한꺼번에 뻥 뚫린 어두운 구멍 속으로 던져 넣었다.

콰광, 쾅!

폭음이 터졌다. 뒤엉킨 비명들이 폭음보다 길게 뻥 뚫린 구멍에서 새나왔다.

「새끼들, 있긴 있었군…」

「을매나덜 고상이시요. 어여 오시게라.」

남녀 가리지 않고 마을사람들은 인사하기에 바빴다. 아이들은 그런 어른들 뒤에서 두려움과 호기심에 찬 눈들을 굴리고 있었다.

「안녕허시요. 춘궁에 살기덜 에롭제라?」

조원제는 그들에게 웃음을 보내며 인사를 받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들이 내비치고 있는 친절스러움을 그대로 다 믿지 않았다. 그들은 토벌대에게도 똑같은 태도를 취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그런 행동을 간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들을 불신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두 세력의 틈바구니에 끼여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들이 마음 저 깊은 밑바닥에 숨기고 있는 진심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문제였다. 그 진심이 이쪽을 지지하고 따르게 만드는 것, 그것이 또 하나의 투쟁이라는 것을 조원제는 잊지 않고 있었다.

「동지 여러분, 여러분들은 지난 ‘오·일오 결정’ 이 내려진 다음 낙망이 되어 기운들이 빠지고, 앞날이 걱정되어 투쟁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여러분들은 휴전협정이 가조인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에 여러분들은 또다시 놀랐을 줄 잘 압니다. 그러한 사태에 임하여 앞으로 우리 모두가 취할 투쟁방향에 대하여 당의 결정을 여러분들 앞에 알리고자 합니다. 당은, 지난 ‘오·일오 결정’ 이 내려진 그날로부터 우리의 투쟁이 현실투쟁에서 역사투쟁의 단계로 바뀌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는 바입니다. 동지 여러분! 모두 똑똑하게 들으십시오. 우리의 투쟁은 이제 현실투쟁이 아니라 역사투쟁 속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동안 학습을 열심히 해왔으므로 현실투쟁이 무엇인지, 역사투쟁이 무엇인지 다 아실 것입니다. 현실투쟁은 인민해방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눈앞에서 성취시키는 것이며, 역사투쟁은 인민해방을 우리가 목숨을 바쳐 뒷날 역사 속에서 성취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역사투쟁은 바로 목숨을 바치는 죽음의 투쟁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투쟁은 오직 한 길, 우리보다 먼저 역사투쟁을 벌이고 죽어간 수많은 동지들의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

죽음이라는 결말이 전제된 싸움을 해야한다는 것이 비극이다. 나에게는 역사투쟁이라는 이름으로 개개인을 이념 아래 희생시키는 것이 전체주의적으로 보이지만, 이들에게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저항을 역사가 평가해줄 것이라는 희망과 그런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을 것 같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기로 결정한 시민군들은 왜 죽음이 확실한 싸움을 피하지 않았을까 고민했는데, 비슷한 희망과 사명감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소장 동지, 소장 동지, 이것 좀 보십시오. 결국 이럴 줄 알았습니다. 보십시오, 그때 구십사호 결정서에서 모든 잘못을 남선 단체들한테 덮어씌웠을 때 저는 벌써 이런 결과가 올 줄 알고 있었습니다. 당이 종파주의를 조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러나 소장 동지의 면전이라 차마 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참았습니다. 그런데 이것보십시오… 휴전이 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이렇게 남로당계만 쏙 뽑아 이 꼴을 만든단 말입니까. 이건 벌써 그때부터 음모된 종파주의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래도 당을 믿어야 합니까!」눈에 불을 켠 이해룡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김범준은 느리게 눈을 올려떴다.

「이 동지, 그때 내가 이 동지한테 했던 약속을 지킬 때가 온 것 같소. 이 동지가 할말이 더 많은 것 같은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털어놔보시오. 어떠한 내용이든 정식 토론으로 접수하겠소. 」 김범준은 담담하게 말했다.

「예, 할말이 많습니다. 저는 그때 남선 단체들이 모든 걸 잘못했다고 했을 때 솔직하게 말해 분하고 억울했고, 너무 절망을 느꼈습니다. 그럼 북선 단체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인데, 당이 어찌 그리 편파적인 결정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말입니다, 남로당과 북로당은 벌써 오래 전에 합당을 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조선로동당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철통같이 믿었고, 오로지 조선로동당과 인민의 승리를 위해 투쟁을 바쳤습니다. 남로당의 잔재를 일소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인공이 시작되고 멋모르는 사람들이 '박헌영 동지 만세’를 부를 때 제나 모든 당원들은 그런 행위를 철저히 막으며 ‘김일성 장군 만세’ 를 부르게 했고, 왜 그래야 하는지를 열심히 지도하고 학습시켰습니다. 그리고 북선 동무들이 갖는 우월감과 자만으로 많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남선 동무들은 충돌을 피하고 좋게 해결하려고 많이들 참고 노력해왔습니다. 그런데 당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남선 단체들에게 책임을 씌우더니 결국은 남로당계를 다 숙청하고 말았습니다. 그럼 남쪽 출신들인 우리는 뭡니까. 우리는 분명히 남로당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위해 투쟁해야 합니까. 누구를 위해 투쟁해야 합니까. 당한테 버림을 받았으니 이제 와서 개들의 세상으로 손을 들고 내려가야 하겠습니까? 말씀 좀 해보십시오, 소장 동지!」이해룡의 충혈된 눈에는 눈물이 번지고 있었다.

김범준은 이런 상황에서도 중앙당을 대변하지만, 결국 김일성을 위시한 북로당은 남로당에 책임을 씌워 내부결속과 김일성 개인의 영향력을 강화시켰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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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 내 삶에서 주목할 만한 책들
  • Goodbye 2021
    •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거실 책장 한 칸을 시커멓게 차지해온 10권의 태백산맥. 언젠가는 이걸 읽어야 한다는 중압감을 가져왔는데, 드디어 읽기 시작했다.

  • Goodbye 2022
    • 지난 12월 태백산맥을 읽고 보성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드디어 갔다.